201
잘 할 수 있어, 조금만 힘내 줘. 어쩌면 아름다울 지도 모르는…… 세상에 설 스스로를 위해.
202
붉은 색은 생명의 색이라고 했던가? 뭐어, 붉은 색은 그럴 지도 모르지만 검붉은 걸 넘어서 시커먼 저걸 애초에 생명이라고 부를 순 있는 거야?
그건 그것대로 기분 더럽고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아.
203
무언가를 부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고 말하면 넌 비웃으려나?
현실을 머리가 못 따라가서, 통각으로 겨우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고 말하면 넌 비웃으려나.
204
뒤돌아보면 새하얀 햇빛이 바닥을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 다가가면 이대로 하늘에 녹아 사라질 수 있으려나?
푸른 색, 붉은 색, 하얀색. 컬러풀하고 좋지, 응.
이제 잃어버릴 것도 없어.
이제 잊어버릴 것도 없어.
205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였구나. 닿았구나.
전부 알고 있는 얼굴 하고 있잖아.
206
████.
부서진 무언가를 부수지 않으면 살아있다고 느낄 수도 없는 나한테는, 이 그리운 감상이 새로운 도피처가 될 거야.
207
████.
부서진 무언가를 부수지 않으면 살아있다고 느낄 수도 없는 나한테는, 도피처 같은 건 없어.
이제 전부 확실해졌어.
208
마지막 말은 짧은 편이 좋지.
역시 나는 살아 있고 싶어.
209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인들 뭔 상관이람.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도, 뒤에서 등을 떠밀듯 바람이 불어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210
그냥 나는 살고 싶었어, 살리고 싶었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닿지 않을 거니까.
211
호흡은 그저 공기를 삼키고 뱉는 행위에 지나지 않으니까, 호흡을 한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212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틀린 걸 부수는 거라고 답하면 안 되려나.
『무얼 위해서?』의 답으로써. 답한들 어떤 의미도 만들어낼 수 없다면…
213
무슨 말을 듣든 헛소리로밖에 들려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여기에 있고 싶어서 눈 앞이 흐려진다.
번지듯, 배어들듯, 무언가가 마음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그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214
교복 입을 나이에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는 건, 축복받은 게 아닐까.
…또 하나의 가능성, 이었을지도. 조금 더 일찍 당신을 만났다면, 저랬으려나… 싶은.
그 가능성의 미래가 나… 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내 인생에 당신이 들어온다는 건 운명이라는 걸까요.
빛나는 청춘이 있었던 것, 더 일찍 당신을 만난 건… 조금 부러울지도.
215
어릴 때 화분이나 식물을 대하는 방식, 작은 동물을 대하는 방식 등에서 스스로의 인간관계를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해.
예를 들어 길 가다가 예쁜 꽃을 보면 우선 뜯고 본다든가, 그러면 당신은 사람에게 쉽게 다가서고 쉽게 상처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
작은 동물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아예 집에 두지 않는다든가, 그러면 당신은 인간관계에 있어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쩌면 외로운 사람.
216
그럼 그렇게 계속 날 사랑하세요.
217
분홍빛 꽃이 만개한 길을 걷는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색이다. 하지만 저 쪽에 따로 똑 떨어져서 핀 하얀 꽃에 괜히 눈이 갔다.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 했다. 사진으로 전해질 색이 아닐 뿐더러, 꽃은 그냥 스쳐 볼 때가 가장 예쁘니까.
218
그것은 분명 꿈이었다. 꿈은 아무래도 깨고 나서야 구별이 간다.
내 앞에 쓰러진 나는 내게 달라붙어 오열하고, 애원했다.
제발 자기를 이젠 그만 죽여달라고.
이렇게 비참하고 처절하게 애원하는 나를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게 내 인생은 나름 평탄했고, 사소한 일에 구질구질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기에 무어라 답할 수도 없었던 게, 나는 애초에 자살 같은 건 시도하지 않아. 무엇이든 나의 컨트롤을 벗어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 「무엇이든」에는 나 자신의 기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냥 아무런 생각도 감상도 느낌도 없이, 목이 터져라 우는 나를 그저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꿈이 괜히 더 기분나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내가 질문할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219
몇 천 년 살아온 나도 모르는 걸 다른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그런 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220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 모른다. 당신이 함께 해 줄 기회. 당신과 내가 가질 운명의 결실을 보여줄 기회.
221
그러니까, 나는 나의 「절박함」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셈이다.
222
세상에 괴롭지 않은 사랑은 없어요.
223
인정하지 마십시오.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무언가를 인정하고 이해할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224
인간은 서로 지탱하는 생물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구원이라 해도 좋겠네요.
225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 여름 교복 차림의 나, 내 앞에 선 검은 옷의 남자에게서 유리로 만든 사과를 받는 꿈을 꿨어.
운명의 붉은 사과와, 행복의 푸른 사과.
꿈에서 받은 걸 곁으로 가져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네.
226
심장을 유리로 갈아끼우면 이런 기분이 들까요?
뇌수를 납으로 갈아채우면 이런 느낌이 들까요?
물은 끈적끈적 차가웠습니다. 몸은 오래된 밀랍 인형처럼 딱딱했습니다.
227
불안정한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주변은 천천히 안정되어, 내 감각은 그것에 점점 익숙해집니다.
살짝 삭막해보였던 새 집도, 어쩐지 조금은 낯설었던 그 사람도, 이제는 그 모두가 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228
그건 네게 혀가 없기 때문이겠지.
229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이 괜히 그런 걸 의식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요, 독선이죠.
나는 그 사람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내 곁에서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그딴 건 아무래도 좋거든요.
230
느낌만은 생생하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지만 그럼에도 아프지 않고, 눈을 가리는 장막도 아닌 이 무언가의 관념체는 분명 「스스로를 가장 아프게 만드는」 병의 일종이었다.
이를 고치는 방법을 아는 인간은 없다. 그건 오직 나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야.
231
걱정 섞인 그 사람의 말에 매번 짜증 섞인 투로 반박해 왔지만, 정말로 이게 낫는 걸까?
조금은 신경이 쓰입니다. 뭐어… 낫지 않더라도 곁에 그 사람이 있어 준다면 저는 괜찮지만……
232
아이가 한 순간 한 순간 자라는 모습을, 인간의 형태를 형성해가는 모습을 망막에 박히도록 바라본다.
233
두 사람에게는, 모른 척 해 줄 환경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을 눈치채지 못 할 만큼만 비틀린 주변이 필요했다.
234
████는 잠깐 든, 조금 위험한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비틀린 행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비로소, 적어도 행복하게는 만들어 주고 싶어.
그는 운명의 붉은 사과를 먹어치웠다.
235
이건 당신이 주역인 영화. 하지만 주인공 자리는 어째 내가 가져가 버린 것 같아, 죄송해요.
주변의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미지는 내게도 조금은 익숙했다.
모두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은 날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기적이니까, 그래도 괜찮아.
236
당신과 함께 해 온 시간이 짧았던 만큼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군말 없이 당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 뿐이었다.
237
나도 이렇게 웃을 수 있었다면 당신은 날 잊지 않을 수 있었을까?
헛된 생각은 꼭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행복만을 가정한다.
238
정말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과거로 돌아가는 중이라서… 도리어 내 쪽이 주위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더라도, 나는 당신과 현재를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만.
239
이름을 수 차례 되뇌이던 당신은, 언제나 보던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상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을 그 아이같은 얼굴은 아침 해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다시 한 번, 반짝임이 마음에 남았다.
240
피네가 없는 도돌이표, 한 곡 반복재생… 언제나와 같은 물음에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한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다.
돌고 도는 기억은, 우중충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나아질 게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241
사랑은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야.
사람도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지.
242
역인과 도넛은 어때? 도넛구멍에 닿으면 나랑 도넛 빼고 모두 바뀌지. 더 이상 네가 아는 세상은 없는거야!
먹으면 무력화되는데, 난 이 도넛이 노랑 스프링클 도넛이었으면 좋겠어.
243
할 거면 지금이야! 「나중에」같은 소린 도쿄만에 갖다 버리라고.
244
물론 해결책의 아주 일부분이니까, 다른 가능성도 많아. 꼭 저게 정답인 것도 아닌데 뭘.
인간의 가능성은 74억 개쯤. 그 중에서 네 정답은, ████…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안 그러니?
사실 무슨 일이든 다 똑같지만 말야.
245
필요할 때 솔직해질 수 있게 되는 걸 성장이라고 한단다.
246
틀린 말은 아닐텐데… …무섭니?
뭐어… 그렇지, 그게 일반적이지. 그런데 너만 무서울까?
247
손바닥 사이즈의 운명이라면 무겁지도 않고 적당히 귀엽지 않니?
행복은 손에 쏙 들어갈 정도의 사이즈가 제일 좋은 것 같아!
248
나는 일어설 수 있을까요? 그 사람과 함께 다시 앞으로 갈 수 있을까요?
새로운 길은 역시 불안합니다.
249
어떤 말로 위로해야 힘이 될지,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당신과,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요.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들 기다려 줄 거라고 딱 한 번만 더 믿어 주세요.
250
나는 네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이제는 좀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넌 좋은 사람이야.
251
글은 한 사람만으론 절대 쓸 수 없을 거야. 우리가 읽는 모든 글은 한 사람이 보는 모든 인간의 목소리와 역사를 조금씩 조금씩 담아놓은 합창 비슷한 거라고.
그런 글을 하나 더 읽을 때마다 종이를 겹치는 것처럼 세계가 넓어지는 기분을 아니? 분명 같은 시공간이 배경인데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확 달라지는 게 나는 너무 재밌어.
그렇게 하나하나 겹쳐져야 만들어지는 커다란 한 장면을 보고 싶어, 나는!
252
…희생은 필요해, ████.
253
……████, 정신 차리세요.
전 여기 없다구요.
254
어제는 창 밖에 있었어요. 따라갔어야 했는데, 막혔어. 누가… 누가, 나를 가로막고 있어요.
255
인간이었을 적의 나를 부디 기억해 주세요.
256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조금 부족하다고 느낄 때 사실은 가장 행복한 걸지도 몰라.
257
오늘은 체리 베흐란다, 네가 체리를 좋아한다고 들었거든.
아, 맞아. 달달한 과자는 좋아하니? 마침 우유향 마카롱이 들어왔어,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나더구나.
258
달에게 흔들리는 물이 찰랑찰랑. 무릎까지 차 올랐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259
왜 이렇게 됐냐고요?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겁니까?
…하, 참. 그건 이쪽이 묻고 싶네요. 그보다 당신들 탓 아닙니까? 진짜 악질이군, 그런 건 당사자한테 묻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니까 물어도 소용 없어요. 그냥 인생 하나 말아먹은 피해자라고요, 전.
260
비밀조직 소설 같은 소리 한다 했는데 진짜 비밀조직이었다니, 어이가 없죠. 뭐… 당연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그만둘 생각은 없었어요.
좀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돈도 많이 주고, 뭣보다 하나 남은 가족이 이 건물 꼭대기층에 있는데요. 그것도 어린애 모습으로요. 어른인 제가 지켜 줘야지요!
261
네가 말을 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네가 이 쪽을 봐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별 중요하지도 않을 이야기를 꺼낸다.
네가 듣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262
인간이라면 모두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잖아?
그렇게 생각을 끝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끝까지 나쁜 사람일 수는 없겠구나, 싶더라.
애매한 건 짜증나서 싫어하는데, 정작 내가 제일 애매한 성격이라니.
263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이 시간이 영원같아, 물론 좋지 않은 의미로.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너를 지키는 유일한 기사여야 했다. 독선이야. 맞아!
…그래서는 안 됐다.
264
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안심했으면 하는 것 뿐이야, 오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이젠 알았잖아? 적어도 내가 있으니까.
265
술잔이 달빛에 빛났다. 가게의 위치, 행복의 거리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기분이었다.
266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 투성이였으니까.
267
금빛 노을이 지는 하늘을,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잿빛 연기가 갈라내었다.
오늘도 매 순간, 세상에는 태어나는 사람과 죽는 사람이 있다.
268
2037년에 잠깐 다녀오는 바람에, 오늘은 조금 지쳤습니다.
별로 바뀐 건 없었어요. 나도 전혀 성장하지 않았죠, 예상대로요.
엄마가 건강해서 다행이었어요.
269
꿈 속에서 죽는 건 어렵지.
270
이런 걸로 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살아 있어서, 받을 수 있는 선물인걸. 그렇죠?
271
작다고 해서 얕보이면 곤란하거든, 우습지? 이런 거. 주위에서 보면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전력질주하고 있어, 나는!
적을 만들기 쉬운, 미움받기 쉬운 내가 나는 엄청나게 좋아!
272
그럼 그렇게 계속 날 무서워하라고.
273
맘대로 하라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곧 내 일부니까.
어떤 취급을 받든 자신은 자신이고, 남이 원하는 대로는 될 수 없어! 그걸 이해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안 돼.
274
어떻게 꾸며봤자 어차피 죽을 땐 몸뚱아리 하나밖에… 아니, 남는 게 없네?
275
별로? 본받지 마, 나 같은 사람.
276
비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울함은 저의 일부입니다.
더이상 우울함을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저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 말아주세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떨어져 줄 텐데 굳이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도와 주지 않아도 저는 괜찮아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답니다.
277
병원의 지하에는 별 관찰이 취미인 선생님과 평범하게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곳에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것들이 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한데 누가 날 다시 끌어올리는 거야 매번? 죽어버려.
278
████가 정말로 여기서 나갈 거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대답을 미뤘습니다. 물론 나갈 생각은 요만큼도 없지만,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이 건물에는 출구가 없었으니까.
279
나도 오랜만에 이야기가 통하는 인간을 만나서 즐거워, 서두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로 가끔, 나락 끝까지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은 매번 생각하지만 최악이야.
280
이제 갈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와 함께 병동의 엘리베이터를 향합니다. 새벽의 온통 푸른 어둠을 깨트리듯, 엘리베이터의 문이 노란 빛을 내며 열립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네 안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은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위로 끝없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게 있어 어떤 인간이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습니다.
281
그 붉은 밤의 일도, 언젠가 이야기해 줄 테니까.
282
그 뒤로 벌써 4년이야, 난 아직도 널 잊지 않고 있어.
잘 지내고 있다고 믿을래. 이런 못 미덥고 한심한 소꿉친구를 늘 지켜봐 줘서…… 고마워.
283
성장은 스스로 하는 거란다. 아무리 몸에 좋은 요리가 밥상에 차려져 있더라도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잖니? 결국 그 정도 차이야.
284
자기소개를 다시 해야겠구나. 나는 네 또다른 가능성이야.
네가 그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나아갔을 때의 종착점이지.
285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제가 그 행복함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어.
286
그러니까, 아니라고 하잖아!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만큼 나도 당신이 필요하다고!
287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도, 그의 이야기도,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굳이 이유를 물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야기 따위 존재할 수 없으니까.
288
모든 이야기는 그저 제 머릿속의 조각들일 뿐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이 이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289
어머나, 정말 새삼스럽네요. 싸늘한 시선들로부터… 그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요?
290
도망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당신의 자유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당신이 만든 허구의 존재니까요.
291
그러려면 한 발짝, 나가야겠죠?
싫은 기억을 잊기 위해서라도.
292
……왜 내 바람과는 정반대로 모든 일이 돌아가는 거지.
왜 내가 바랐던 건 절대로라도 해도 될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 거지.
293
네게 지켜 달라고 한 기억은 없다.
나는 평범하게 살다 죽고 싶었다고.
내가 바랬던 건 유한한 시간. 짧은 시간이지만 한껏 꽃피우고, 지는 것.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아. 죽어도 죽지 않는, 고통받지도 못하는 삶……
294
그리고 나는 이제 더는 당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어요.
295
역사의 뒷편은 살벌하지.
296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그건 더 이상 잃을 것조차 없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란다.
297
상대의 불행을 비웃으면 쓰나, ……나갈 땐 뭐라도 챙겨 줄 테니까.
298
적의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손님들이 적대적이었다면 나는 또 몇 번이고 죽었겠지. …청소도 귀찮은데.
299
현실은 많이 다르지. 너희들이 아는 역사는 이긴 사람들의 역사 뿐이겠지만…
뒷면은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거랑 같은 거야.
300
…너희들에게는 먼 옛날 이야기겠지만, 내게도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어.
너무 짧았지. 그 아이는 천수를 누렸겠지만, 나는 아니니까.
301
하지만 눈 앞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말 그대로 무無.
…무霧? 그렇습니다, 안개입니다.
짙은 안개 속에 당신만이 남겨져 있습니다.
302
당신은 평범한 하루를 보냅니다.
…진부하다고요?
괜찮아요.
모든 이야기는 평범함, 에서 아주 조금 뒤틀리는 것부터 시작하니까요.
그래요, 당신은 평범한,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빠진 기분이 드네요.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요.
303
그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소중한…… …뭐더라?
304
심연에 기억을 비추어보는 대가.
305
소녀는 가늘게 웃으며 말합니다.
그 눈동자의 푸른 심연은 마치,
당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습니다.
306
그래도 괜찮습니다.
함께 돌아가기로, 굳게 결정했으니까요.
원래 있던 곳으로, 함께 돌아갈 사람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당신이 계속해서 찾아왔던 소중한 사람의 손을 꼭 잡습니다.
307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 주세요.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308
「왠지 모르게」라는 이유 하나로 찾으러 온 거라면…… 조금은 믿을 수 있을 지도 몰라.
309
왜 존재를 지우고 싶어했을까?
가장 가까이 있던 너라면 알고 있지?
310
어렵구나, 으음. 그러게, 짧은 시간에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너무 빨리 답을 낼 필요는 없어.
311
……그대로 뒤로 돌아갔으면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312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이 앞으로 나갈 생각은, 안 해 봤거든요.
313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라…
선배만 저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저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요.
████라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라구요.
314
음…… 기억에 남을 이유가 없는데.
저를…… 그렇게까지 기억에 담아둘 이유가, 없죠?
315
무의미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나는…
그러면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존재를 지워낸 의미가 없어지잖아…
316
당신이 아픈 건 싫으니까. …아니네, 싫었으니까… 네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고작 나 하나가 죽은 걸 가지고 누군가가 아파하는 건 싫었으니까.
아예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하고.
317
이렇게 말해놓고도 웃기지만, 사실 조금은 망설여져요. 당신이 여기서 나가면, 저는 완전히 없어지니까요.
…분명 그걸 바랐을 텐데.
318
어디든 상관없어. 몰라, 그걸로 됐어. 남겨야 해.
남겨야 해,
어떤 형태로든!
319
어쩔 수 없네요, 거기까지는… 제 이름은 「████」, ████. …잊지 않아 줄 거죠.
320
갑자기 발 아래가 불안정하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마치 금방이라도 세계가 무너지려는 듯한…
존재가 사라지려는 것 같은, …존재가 이미 사라진 것 같은 두려움, 이것은 두려움입니다.
자각하는 두려움.
321
당신이 날 기억하고, 매달리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매달린다면… 나는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달도, 그 다음 해에도… 계속해서 살아가겠지요.
당신만이 그 존재를 알아 주는 고독한 세계에서…
영원히.
322
하지만 그것 또한, 두 사람에게는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323
인류는 무언가를 반복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발전하기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324
흔히 운명은 고리 모양, 수레바퀴 모양이라고 합니다. 윤회라는 단어의 유래지요.
동그란 건 좋아합니다, 예쁘잖아요. 거기에 꽃을 얹으면, 화관이 되겠네요.
325
모든 인간에게는 어떠한 종류이든 실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오에 과오를 더해 인생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326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나요?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327
여러분은 정말, 그냥 모인 걸까요? 나아가지 않은 채 문 앞에 머무를 건가요?
328
세계의 멸망은 정말 막을 수 없는 걸까? 만약 운명을 갈아탄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세기말과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인류는 반복을 좋아하는 생물인가.
329
눈은 상대의 마음의 거울. 시선을 통해 우리는 연결될 수 있었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다.
330
신은 전지전능함과 동시에 무능하다.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종교가 만들어지고, 예배당을 만들고,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또한 불완전하며, 그래서 완전한 것에 기대려 했던 것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331
불완전한 것이 몇 개가 모여 본들 그것은 하나의 완전체가 아닌 불완전의 군체에 불과하다.
그것을 깨달은 이상, 나는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332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할 운명에 있다.
333
이른 아침, 새벽녘의 거리입니다. 당신이 보는 그림자는 당신에게서 찢겨져 나갔습니다.
부서져 나간 것은 정말로 그림자였을까요, 당신에게서 분리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334
해당 오기억을 부정함으로써, 현재 여러분의 관계를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335
운명을 부정한다면, 운명이 있을 자리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336
죽어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살아 있어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죠.
스러지는 것에 원인이 있을까요?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원인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337
어차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면,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338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이건 「절망」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절망」이지요.
절망이 사회 현상이라 해도, 개개인의 조그마한 절망 또한 무시당해서는 안 됩니다.
339
벚꽃이 이곳저곳 만개한 어느 봄날의 일이었습니다. 모두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340
딸랑, 은제 티스푼이 부딪히는 소리가, 스토브의 물이 보그르르 끓는 소리가.
조용하지만 조용하지 않은 생활음의 향연에 파묻힌 그에게, 천천히 전해져 오는 일상의 편안함.
341
눈꽃이 그려진 패키지의 화이트 초콜릿. 무심코 하나를 입에 넣자, 퍼져나가는 행복한 달콤함이. 레몬티의 향을 확인하자, 올라오는 따뜻한 달콤함이.
작지만 따뜻한 달콤함을 준비하는 그에게, 천천히 전해져 오는 조그마한 행복.
342
그는 과거의 자취를 다시 소매 안에 넣습니다. 숨기고 싶었던 예전과는 다른 이유입니다.
343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344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생일, 평범한 어린아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 4년에 딱 한 번, 특별한 날에만 걸려오는 누군가로부터의 전화가 좋았습니다.
345
혼자보다는 둘이 있는 게 더 따뜻하니까.
346
휴일 낮의 주택가는 정말로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고, 온 골목이 조용합니다. 슬리퍼 끄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휘날리는 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조용한 거리를 채웁니다. 강한 햇빛이 흰 벽에 반사되어 어디를 봐도 눈부시네요.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빛도 꽤나 뜨겁습니다.
347
왠지 멈춰 선 곳은 거대한 녹색의 앞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커다란 나무가 가득한 곳, 자세히 보면 그 사이로 보이는 솔도파와 진회색의 비석, 형형색색의 꽃들. …커다랗고 오래된 절. 어째서 이 곳에 멈춰 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라고밖에 이유가 없네요, 그냥 끌려서?
348
조금 이상할 부탁을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잠에 들었습니다.
349
가장 편안하고 따뜻할 잠깐의 수면은 기대와는 다른, 어쩌면 예상대로인 끝을 맞았습니다.
350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도 부모님도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나는 분명히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는데도 사실은 아프지 않은 게 되어 버리니까요. 그럼 내가 아픔을 호소한 것도, 지금 이렇게 병원에 다니고 있는 것도, 그냥 내 기분의 문제일 뿐 사실은 멀쩡한 사람이라는 게 되니까요.
351
결국에는 내가 이렇게 쉬는 걸 전면으로 부정당하는 기분과, 멈춰 선 것 뿐이라고 정정당하는 기분만 듭니다.
352
익숙하다고 해서 당연한 건 아니니까…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353
행복과 돈을 저울질하는 건 그닥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354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뒤쪽은 어두워서 무서우니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필요없는 것들은 내버렸습니다
기쁜 추억은 걸어 두고
아픈 곳은 조금 고치고
서툰 발걸음이든 가시밭길이든
나는 여기라고 힘껏 소리치며
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355
감각을 차단당하는 매일매일을 아무것도 없이 흘려보냈다.
볼 수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찾는 것은 어렵다. 글은 문자의 형상에서 구불구불한 선으로 변해 흩어진다.
들을 수 있는 것은 거대한 무리의 뜻모를 웅성임뿐, 그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을 수도 없다. 가끔 그 웅성임은 어디의 언어와도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에서 펼쳐지는 다른 세계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356
몸이 불편하건 정신이 불편하건,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성에 찼다.
357
하긴, 누가 믿겠어. 이런 작은 몸에 갇힌 것이 사실은 인류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라는 걸.
358
이형의 가희는 신의 노래를 부른다.
메마른 세상에 비를 내려 생명을 만든 노래.
메마른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 사랑의 노래.
아주 작은 것에 우리는 구원받기 마련이다. 그건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예외는 아니다.
359
혼자 서는 게 당연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스스로에게 부러졌지만.
부러져도 주저앉지 않을 거야.
360
미안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런 거야, ████.
361
지구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까마득한 손주를, 다음에도 만나러 와 줘요.
362
하지만 메마른 기분은 나아지지 않아. 무언가에 마음을 쏟아붓는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내가 가장 마음을 쏟아붓는 상대는 나 자신인데, 이상하기도 하지. 모든 일은 내 고집대로 나아갔는데.
적어도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다, 그럼 그 탓을 했을텐데.
363
나는 내가 그릇이 큰 건 아니라도 몇 명쯤 받아줄 여유는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행동해 왔구요. 인간관계든 돈이든 상담은 프로예요, 지금도요.
근데 그 따위로 통수를 쳤어?
364
같은 지적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몰랐어요. 멍청하면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바보로 보죠. 그러면서도 나를 또 무서워해요, 의미를 모르겠다니까. 어쩌라는 거람?
365
절대적인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해왔어요.
366
별로 남에게 못 꺼낼 이야기도 아니죠. 책이라도 써 볼까, 어?
367
며칠 전, 그에게 내가 인류와는 관계없는 인격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368
「왜 놓아 준 거야?」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자 한 소녀가 서 있습니다.
분명히 인기척도 발소리도 없었는데.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곧 상관있게 될 거야.」
그리고는 어느샌가, 사라집니다.
369
이 근처는 늘 조용해서,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370
나는 그 사람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내 곁에서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그딴 건 아무래도 좋거든요.
……하지만 다른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371
그냥 그 일 자체로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니까요. 현실과의 괴리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날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372
보다시피 다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돼서… 그래요, 처음 감각이 돌아올 땐 너무 무서웠어요. 내가 처음 느꼈던 게 뭔진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이, 가슴이 저릿저릿 숨도 못 쉬게 아프니까.
차라리 낫지 말걸, 같은 바보같은 생각들을 그 사람한테 그대로 내뱉기도 했었죠.
차라리 마음이 없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딱히 그렇지도 않은 주제에 말이에요.
373
우리가 체온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저들과 마찬가지로 부둥켜안고 웅크리고 있었을까.
374
바깥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우리가 기억하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길에 보이는 사람 중에서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건물은 싸그리 부서져, 고층 건물에서 깨져 떨어진 커다란 유리창 파편에 몸을 뚫린 시체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졌다.
밖에 나가서 직접 보면 상황에 맞는 생각을 하게 된다, 라.
흰 옷 언니의 말이 납득이 가는 순간이었다. 정말 이럴 수 밖에 없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의 풍경이 비춰진다.
375
이게 모두가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세상의 멸망이겠지. 그걸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런 식으로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어.
376
이 참상에서 시간이 지난 미래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지하에 보존된 채라면, 아마 따뜻한 몸을 가졌던 인간 따위 다 죽어 사라지고, 과거에 인간이었던 차가운 고철 덩어리만이 이 어둡고 넓은 땅을 끝없이 돌아다니겠지.
…같은 끔찍한 이미지가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지만, 가슴 한 구석에선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셋이라도, 평생 함께니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참 이기적인 생각이다.
377
이 시나리오가 어떤 대규모 갈등의 연장선인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목적을 알 수 없는 전투에 끝은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우리 인류의 끝일지도 모른다. 일지도…가 아니라 아마 확실하겠지.
378
그럼 네가 죽여봐.
379
이 세상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조용함에 조금 무서운 기분도 들었습니다. 내가 사는 거리는 늘상 소리로 가득한 번화가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거리는 익숙하고, 이 느낌은 익숙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내가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어. 없는데도 말입니다.
380
너무 울었는지 또 다시 머리가 새하얘집니다.
당신이 무어라 말한 기분이 들었지만, 너무 가까워서 들리지 않았습니다.
381
빨갛다 맞아 내가 기억하는 것 새빨간 하늘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말라고
눈 앞이 온통 빨간색이었다 하늘도 빨간색 땅도 빨간색
그리고 거기에 네가 쓰러져 있었어 죽지 않았어
네가 누군지 나는 몰라 모르지만 머리가 아프다 뭘 잊지 말라는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382
빨간색은 너무 아프다, 피는 빨간색이니까.
383
모두의 집에 하나씩은 있는 간편 차원이동기! 한 번 써 보세요, 여러분에겐 각자가 원하는 세계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384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아서는 안 될 만한 것이었을까요?
아뇨,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당신의 마지막 방어기제입니다.
385
이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어요.
제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디에?
그곳에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많이 혼란스러워 보입니다만.
386
굳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알아도 몰라도, 바뀌는 것은 없답니다.
387
세계는 절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절망의 세계에 어서 오십시오.
388
당신은 그저 도망치고 있을 뿐입니다. 눈 앞의 절망에서.
알고 싶지 않죠?
몰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당신이 「그것」을 모른 채로 있기를 바라는 당신의 방어기제.
하지만, 제게로 도망치는 것은,
부담스러워.
389
긴 머리카락을 고양이의 꼬리마냥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지만 반응은 없다. 마치 나와 같은 차가운 얼굴로 도도히 빵을 구울 뿐이었다. 그렇구나, 인간 아래의 생물도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내 인상, 그렇게 나빴던가.
390
물론 현실이라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독자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서까지 매력을 느끼도록 만드는 그 필력은 아무래도 상당하지요.
391
그는 절대 노력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역경에 짓눌렸을 때도 마찬가지.
평소에 곁에서 늘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그의 노력은 지금보다도 빨리 빛을 볼 수 있었겠죠………
392
당신이 처음 안 색은 녹색이었습니다. 나는 그 날부터, 녹색이 들어간 원피스를 자주 입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간 날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연습실에서는 녹색의 음색이 새어나왔습니다.
어떻게 당신의 연습실인지 아냐니, 당신이 연주하는 음악에서는 늘 작은 빛이 반짝이고 있으니까요.
나는 안에서 이 쪽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멈춰서서, 음의 색을 바라봅니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으니까요.
393
당신은 언제부턴가 내게, 자신의 연주는 무슨 색이냐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말해 줘도 거의 이해하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말합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바다, 비둘기 목덜미 색의 하늘, 나뭇잎 사이로 새는 햇빛, 노랗게 물들어선 하늘을 덮는 커다란 나무의 낙엽.
언젠가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이 모든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당신의 소리에서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보였어요. 하고, 오늘의 감상을 전합니다.
394
언젠가 당신이 푸른색을 알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연습실이 아니라 바다로 데려가 보고 싶기도 하네요. 푸른색은 유일한 나의 색이니까요.
당신이 꼭 볼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물론… 관심이 있다면 말이에요.
395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알게 될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지금 내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그런 게 있다면, 하는 가정에서요.
물론 나도 보통 사람과 같이 충격을 받거나, 못 들은 척 하더라도……… 금새 그 힘든 사실 자체도, 그 사실을 부정한 것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겠죠. 도저히 온전히는 기억할 수 없는, 꼭 무언가가 더해지거나 빠진 칼자국 투성이의 기억 덩어리만이 머리 안을 데구륵 굴러다닙니다.
그런 느낌이 들 때 거울을 보면, 모르는 얼굴의 내가 있습니다.
396
다른 기억이 모조리 사라져도, 머리 안의 내용물이 통째로 바뀌더라도 내가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그 기억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눈 앞에 그려진 네 바람, 지워지지 않는 붉은색.
그 색만은 눈을 깜빡여도, 머리를 부딪혀도, 날짜를 잊어버려도, 이름을 잊어버려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397
기다리고 싶은데 믿고 싶은데 나는 너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누군지 몰라. 당신이 나를 잊지 않았고 아직도 내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기대 같은 건 나 같은 건 내버려두는 게 널 위한 일이라고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머릿속에 나타난 너의 흐릿한 모습이 웃으며 그 목소리로 말한다. 변해버렸구나, 아하하.
…당신은 여전하구나, 바보같이 웃는 거. 당연한가,
이건 꿈이니까.
398
너는 절대로 나를 탓하지 않는다. 나는 소리쳤다. 네 앞에서, 너는 나를 몰라. 거짓말쟁이야. 말의 칼날 言刃 을 휘두른다. 너를 탓하는 나의 말은 모두 내게 꽂혀왔다. 당신은 안타까운 듯한 얼굴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네 얼굴은 내 기억에 없으니까, 네 목소리는 내 기억에 없으니까, 너의 무엇도 내겐 전해지지 않아. 나의 무엇도 당신에겐 전해지지 않겠지요. 서로에게 닿기도 전에 다 사라져버릴 거니까요.
399
그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내 말이 와닿지 않는 걸까요, 어쩌면 쓸모없는 노력을 비꼬는 거냐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자칭 자신의 미숙함에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400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노력할 수 없으니까요.
« SONIATELIER 1~200 | SONIATELIER 201~400 | SONIATELIER 401~6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