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그가 가장 좋아하는 평범한 일상은, 의외로 정말 즐거운 것이었구나.
402
「나는 침울해하는 너를 보고 같이 기분이 가라앉은 게 아닐까 생각해, 아마도. 이 기분은 내가 끌어안은 우울과 닮아 있지만, 어딘가 틀려.」
그건, 「공감」이라는 거야. 다른 사람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돼.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나와 같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거야.
「그럼 네 기분을 알면, 내 기분도 알 수 있게 된다는 걸까?」
어쩌려나, 그걸 물어보러 온 게 아니었니?
403
「많이 무겁고 힘들어 보여.」
내가? …████,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슬퍼하는 것 뿐이야.
404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이에요, 전혀 그럴 필요 없는데. 당신은 하나도 나쁘지 않은데. 우린 전혀 「처음」만나는 게 아닌데.
쓸쓸해요.
405
「여기에 있다」 고 매번 말해 주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지.
406
손이 부러지는 꿈은 정신적 코어가 망가진 상태라고 해요.
무서워요.
407
당신이 이미 죽었다는 걸, 내가 확인시켜 주겠어.
408
저를
죽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409
당신, 늘상 나부터 신경써 주는데 말야… 정말로 내가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410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당신의 친구분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411
구원, 수심, 사랑.
그 수심에서 구원받고 싶다면, 사랑을 버려야 할 것이다.
한 때의 번뇌에 휘둘리지 말지어다.
412
스스로의 존재의의는 살아있는 한 계속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당신을 향한 후회도요.
413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마.
414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도 당신이 아는 ████가 되고 싶었다고!
415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의 소녀는, 붉은 액체가 철철 흐르는 그 팔뚝에 거칠게 바늘을 꽂아넣었다. 소년의 고통에 찬 비명이 귀를 찢었다.
그 울음소리와 온기가 사그라들 무렵, 다시 귀를 대어 보지만 들려오는 것은 없었다.
「…뭐야, 거짓말이었나.」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소녀는 조용히 떠나갔다.
416
푸른 하늘로 떨어지다.
417
저를 이해할 수 있다고요? 거짓말.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내가 숨겼구나.
…미워해도 괜찮아요. 이제 와서, 당신이… 죽고 나서 이런 걸 이야기해도.
418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었던 건가요? 당신… 은, 분명히 내 곁에 있었을 텐데.
맞아요. 지금… 전부 혼란스러워서, 나는………
아마 ████는… 후회하고 있겠죠.
「무엇을 후회하나?」
…당신을 내게서 멀리 떨어트린 것.
419
전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 이 몸도, 당신에 대한 기억도. 그냥… 미쳐서도 계속해서 찾아다녔다는 것, 밖에는.
…그만큼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것밖에는.
420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이유,
당신이 당신으로 있을 수 있는 이유.
421
히어로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422
영원한 어둠 속이라도 불을.
423
그 날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내게
대신 하게 해 주세요.
424
아무도 내가 죽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으니까요.
425
저는 몰라도 당신은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저는 아무도 구할 수 없어요… 당신도 죽었고, 당신도 죽었고, 당신도 죽었고… 당신도 죽었는데…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요……
426
여기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라고 생각할 거야, 다들. ████는 스스로가 짐이라고 유독 자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인간은 혼자 뭐든지 하기는 힘들어.
주변의 어른들도 누군가에게는 짐이고, 또 누군가의 짐을 들어 주면서 살아가는 거야. …와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의지하는 것 정도는 괜찮아.
벌써부터 그런 생각 하지 않아도 돼.
427
자는 게 무서워. 어디 가지 마, 여기에 있어 줘.
428
그 사람은 외로워하고 있어,
곧 출발할 열차가 당신에게 속삭였다.
429
신비는 개뿔, 신비한 건 걔가 아니라 걔의 여권이겠지.
430
시간은 꽤 흘렀지만 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은 하늘이 커다란 유리창을 메웠습니다.
431
████와 이야기하는 것, 즐거우셨나요.
…무언가 느낀 게 있었다, 인가요.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안녕히.
432
당신이 귀찮아할 만큼 꼭 붙어 있을 거니까, 당신이 살아가기 질릴 때까지 살 거니까. 그러니까 울지 말고,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좀 더 행복하자구요.
433
그럴 일은 없습니다. 구식이니까요.
데이터 덩어리가 말하기에는 이상하지만… 「의욕」이 생기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인간의 위로」 를, 한 마디만 부탁드려도 괜찮습니까?
434
마음… 정의할 수 없는 것.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항목입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435
기억하고 싶지 않다면 부정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과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요.
그는 꽤나 기대하던데요, 당신과 함께할 미래를.
436
붉은 등불이 일렁이던 그 장례식은 누구의 장례식이었을까.
437
매 시간 매 분 매 초가 궁금하다고 하면, 이상해요…?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몸은 좀 어떤지… 얼마나 많은데. 기분이 안 좋으면, 몸 상태가 나쁘면… 조금은 의지해 줬으면 좋겠고……
항상 옆에 있잖아요. 새삼스럽지만, 그러니까… 내게 의지해 줘.
438
「나, 도… ████의 꿈을 꾸고 싶구나….」
꿈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옆에 있는데……
꿈에서밖에 못 보는 것보다는, 꿈 같은 건 안 꾸는 게 차라리 더 나을 지도 몰라요.
439
정말 꿈같은 꿈을 꿨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을까, 터널을 빠져나오자 보이는 푸른 하늘의 구름이 금빛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밖으로 올라와 다시 보면 구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냥 땅에 떨어져 있던 거품이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치자 금빛 도는 흰색이었던 것은 점점 붉어지며 녹아 사라졌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거리의 건물은 전체적으로 낮아서 하늘이 잘 보인다. 깊고 가느다란 강은 거리 중앙을 검게 찢어 나누고 있었다. 그 틈을 잇는 것은 희고 긴 징검다리 뿐, 마치 횡단보도처럼 보였다.
그 거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은 하늘이 붉어지는 저녁이었다. 저녁에는 사람이 다니지 못 하도록 물을 더 부어서 흰 돌을 없애 버리더라.
그 마을의 규칙인지, 어떤지.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440
사랑하지 않는 시간에 의미는 없지? ████, 16세! 너희들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매력을 전해주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진정한 마음만 있다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까 ██가 보내는 진심을 받아줘! 너희들과 우리의 사랑 하나하나로 지구까지도 덮어버릴 수 있도록!
441
최악이다.
찜찜하게 무더운 날, 방학인데도 학교에 가야 했다. 여기까진 좋아.
볼 일을 다 보고 나가는 길, 낙제 직전의 이과 선생과 마주치는 바람에 숙제를 받아버렸다. 여기까진… 뭐, 좋아…
그런데 하필 돌아가려고 나설 때 쏟아질 게 뭐람.
허망한 표정이겠지, 지금.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다, 우산도 없다는 뜻이다.
…그냥 포기하고 물벼락이나 맞자, 이미 뇌는 그렇게 결론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 발짝 나서려 했다.
물벼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숙제가 편의점 우산을 들고 있었다. 멀뚱멀뚱 바라보면 숙제는 얄밉게 웃는다.
「이과도 아닌데 바보같이 숙제 받아 버린 애를, 비 맞게 할 순 없지?」
숙제 프린트 머리에 덮으려고 했는데, 젠장할.
442
정신이 들자 어딘지 모를 곳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옛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번화가. 새로 생겼다는 가전제품 가게 유리벽 너머로, 뒤가 통통한 브라운관이 이 쪽을 본다.
달력에 적힌 연도는,
1978년.
태어나기도 전의 시간대는 아무래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탔다, 본가의 동네였는지 다행히 말이 통했다. 그렇게 엄마가 다녔다던 학교를 향해 갔다. 엄마를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중학교 1학년의 엄마를 고등학교 1학년의 딸이 찾는다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만… 나도 갑자기 이런 곳에 던져져서, 당황스러운걸.
하교 시간,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443
새벽 4시. 시간이 멈춘 밤하늘을, 밝게 빛나는 만월이 일렬로 늘어져 떠 있는 시간. 홀린 듯이 하얀 돌계단을 빙글빙글 걸어올라 최상층의 발코니에 섰다.
여러 개의 달은 밝고 차갑게 빛난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커서, 바로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해버릴 정도였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 보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444
죽은 거리에서, 죽은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죽은 거리에 남은, 뼈대뿐인 탑을 올라갑니다. 삐그덕, 삐그덕. 금방이라도 발을 헛디뎌 떨어질 것 같아. 하지만 끝까지 올라가 뛰어내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떨어진 곳은 하늘의 선로를 달리는 손수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빴다고 해야 할지. 주위를 둘러 보지만 아무리 봐도 이 곳이 내가 살아 있던 세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445
심야의 골목은 조심해야 한다. 어떤 이상한 존재와 조우할지 알 수 없으니까.
눈 앞을 가로막고 선 이것들은 분명, 새까만 인면조 무리.
446
「이제 편해질 거야, 엄마 곁으로 가야지? ████.」
아이를 안고 도닥입니다. 귀에 아이가 내쉬는 작지만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그 쪽 귀는 베개에 대고 있던 귀였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 보육원에서, 견습 보육사가 전해드립니다.
447
다들 외롭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야. 먼저 죽어버렸던 사람들도, 한 번 남겨졌던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한 끝을 맞이했던 사람들도, 이번 생은 부디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
448
혼자 남겨지는 기분은 좋아하지 않아요.
449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요.
절대 이런 생각들을 자만이라 생각하지 말아요. 누가 옆에서 그렇게 말하더라도.
450
그러고 보니 ████와 ████의 이름, 둘 다 마지막이 「목소리」네요.
451
나는 나쁘지 않아, 아무것도 안 했는걸.
지치면 전부 전부 내다 버릴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전부 내버린대도 날 너무 혼내지 말아주세요. 중요한 건 내 선의니까.
마음에는 한계가 있어요, 무한한 건 없다고요.
452
어째서인지 내가 찍은 사진만이 홀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내 일은 시간의 균열을 만드는 것. 상자 안에 시공간을 잘라 담기만 해도, 다른 세계는 이렇게 쉽게 태어난다.
453
당신이 남기고 간 것을 읽고서야 눈치챘다.
아, 나 이제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됐어.
하지만 이 기쁜 일을 기쁘게 들어 줄
당신은 이제 이 곳에 없다.
이걸 남길게, 라는 건
멀리 떠나버린다는 뜻이잖아.
「변할 수 없다」 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한다.
아직 내게는 어려운 것, 죽을 수 없는 것과는 달라.
지금 홀로 남겨진 건 내 쪽이야.
마음이 아프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나, 아직 묻지 못했어.
문득 당신의 이름을 떠올린다. 나와 같은 글자, 「목소리」.
그렇구나, 목소리를 내면 되는구나.
잘 정리되지 않는, 서투른 목소리를 내면 되는구나.
당신에게 닿게끔 목청껏 소리쳤다.
울부짖듯이, 소리치듯이.
소리 없는 울음을 내질렀다.
햇빛, 단풍, 눈꽃, 벚꽃.
바늘은 호를 그리며 돌아왔지만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괴로우면, 슬프다면,
아프다면, 외롭다면.
가만히 있지 말고 말을 해 줘.
부탁이니까 뒤를 돌아봐 줘.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몰라.
그냥, 그러길 바랐을 뿐인데.
454
나는 혼자가 아니야. 이 곳에, 당신의 앞에, 부러져도 꼿꼿하게 서 있어.
그런 내 존재를 몰랐다면 지금부터 알도록 해.
나 이 곳에 외친다. 부러진 이형의 노래, ――――『라믈리라임』
455
난 그런 거 몰라. 하지만 내 사랑이 원한다면, 삼천 인간을 죽이더라도 빼앗아 보일거예요.
456
나와 당신의 길을 감히 누가 방해할 수 있겠어?
457
네 운명이 설령 불행이더라도, 그걸 부정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는 일부러 운명이라는 뜻만을 알려줬다.
458
그녀의 존재의의는 인류의 시작과 끝을 보는 것. 인류가 멸망하거나, 지구가 터지지 않는 이상 그녀가 죽을 일은 없겠지. 만약 인류가 모종의 이유로 멸종한다면, 그 때 비로소 그녀는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되살아나지도 않겠지. 아픔 또한 그녀에게는 새로운 감각, 변화일 것이다.
그녀는 해방감에 기뻐할까, 아니면 곧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뻐할까.
459
내게 무언가를 바라지 마, 의지하려 하지 마라고!
원하지 마, 필요한 때만 부르지 마!
460
이 곳에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뭐냐고요?
글쎄요, 내가 아는 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모르지 않을까요.
이미 한 번 죽었다는 자각이 있는 인격, 베어도 상처입지 않는 육신……등으로 보아 정신적인 개념이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이런 큰 일을 어떻게 해내겠어요.
몸은 그냥 그릇일 뿐인걸요. 영혼이 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정말 대충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461
관념체, 할아버지가 자주 말했던 그 세 글자만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실체가 없는 무언가일 뿐이라고 했던가.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쓰자니 기분이 영 불편하지만요. 하지만 인간의 개체 수가 세기 귀찮을 정도로 많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난 싫은데.
462
그렇다고 해서 이 지옥같은 광경이 달라질 것 같진 않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잖아?
물론 평온함을 가장한 말이었다.
463
그랬기에 나는 그들을 만들어낸 것일까, 생각한다. 사람의 몸을 기계로 바꾸는 연구는 불로장생을 소망하던 19세기 말부터 줄곧 진행되어, 21세기 중반만 해도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를 기계화하는 실험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뇌를 기계화하는 연구에는 꽤나 오랜 시간과 연구력이 걸렸고, ████는 그 첫 실험체였다.
생체병기 프로젝트에 일란성 쌍둥이를 고른 건 지금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유전상으로는 동일인물이니 실패하더라도 실험 조건만 바꾸면 된다, 라는 경제적인 이유에서였지만, 시나리오는 점점 우리가 이해하는 범위의 과학을 넘어서 비인간적으로 치닫고 있었기에, 이해력에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버둥을 쳐야 했고 그 희생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464
그저 운이 좋아서 생존에 성공했다는 걸 자각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65
나와 당신 둘만의, 어쩌면 나만의 소박한 기쁨이었고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466
빗물에 섞일 수 없는 내게 쥐어진 그 마음은 우산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무리해서 섞일 필요는 없다고, 사람에 젖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나를 생각해 줄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을까요. 밑도 끝도 없는 바다처럼 느껴져서, 흙 한 줌 던져 넣어 본들 바뀌는 건 없는데.
467
당신에게서는 여름의 냄새가 났다.
468
혼자 있는 건 못 봐주겠더라구요.
「아… 그래,」
물어볼 게 많을 것 같은데.
「………전쟁은, 끝났어?」
469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답니다. 그리고 저는 어줍잖게 눈에 띄려는 것보다는 수수하고 꾸미지 않는 게 더 좋아요. 맞아요, 당신 이야기.
470
고도 1.4m의 시선에서 전해드립니다.
471
내 희망은 당신이었던 거야.
내 사랑은 당신이었던 거야.
472
사랑이 없는 삶에 의미가 있나요? …그리고 역시, 혼자 있는 게 좋아요. 조용하니까.
앞을 막는 건 딱 질색이야. 그리고, 혼자 있는 건 싫어요. 외로우니까.
473
괜찮다고 한 번만 더 말해 주세요.
474
희망을 품은 적들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천사가 아닌 사도.
절망에 빠졌으면 좋겠어.
475
아직 여유는 있어 보입니다.
아직 여유는 있어 보입니다.
아직 여유가… 있을까요?
476
당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하얀색, 하얀색, 하얀색.
그리고 숫자가 얼마 남지 않은 모니터와 패스워드 입력을 위한 키보드.
안드로이드의 목을 절단하라는 듯 놓인 톱과, 그것을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원통형 유리관.
477
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478
나는 떠날 거야, 사랑하는 네 곁으로.
479
이곳이 자기 세계의 전부라면 그 스트레스는 더더욱 크겠지.
480
그의 침대 옆 자그마한 서랍장의 위에는, 언제부턴가 큰 녹색 사과 모양을 한 보조용 배터리가 놓여 있게 되었다. ████는 녹색 사과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직접 줘도 괜찮은데 말이지…」
모두의 마음이 담긴 선물, 은 처음이겠지.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기쁜 것이었다.
481
파란색 진짜 좋아하네, 당신.
난 당신이 좋은데 말이야.
482
多喜川瀬 迸る事 艶やかし
彼の随意 さぞ戀しかな
타키 강줄기 흐르는 모양새가 화려한 것이
그는 자유를 얼마나 그렸을까
483
질문은 하나씩 해 주세요. 가끔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못하는 상황도 생긴답니다, 지금처럼요.
484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 버릴 정도의 상태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확실히 말해 드리는 것이 최선책이라 판단했답니다.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화풀이하는지 아직 이해도 안 되고요. 나한테 화풀이하다니 완전 어이없지.
485
화풀이는 화를 부른다.
486
그거 맞아요. 패전은 1945년, 당신이 있는 지금은 2017년. …용궁성도 예쁜 오토히메도 없… 아, 이건 안 죽어봐서 모르겠네. 74년의 꿈은, 어떠셨나요?
487
그래, 그러지 뭐.
「…뭐야, 왜 이렇게 쉽게 들어줘?」
소원을 이뤄달라고 하지 않았니? 물론 아주 큰 소원인 만큼 대가와 조건은 필요하단다. 목적을 말해. 그리고 내가 이름을 기억해내면, 그건 다시 내게로 돌아올 거야. 대가는 그 때 정하자꾸나.
488
과거를 개변하러 나는 이 자리에 섰어.
너희들은 세계를 구할 열쇠야.
489
안의 안의 안까지 전부 탐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소중했다. 연약해 보여서 닿기만 해도 부서질까 두려웠고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품에 으스러지도록 끌어안는 것 뿐이었다.
490
많이 발전했어요. 저는 그 수많은 실험의 성공례 중 하나랍니다. 물론 ████와는 다른 경우예요. 다시 태어난 건 아니고, 새로운 생명이죠.
491
언젠가 당신은 저와 친구가 될 거예요. 머리도 짧게 자르고요. 지금 보면, 그대로 기르는 것도 어울리네요. 묶어도 어울리겠다.
492
████, 뒤는 맡겼어. 나는 얕보이면 안 되는…….
493
왜 나만 멀쩡하냐니, 그거야 나는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까지. 무리하지 말고… 일어서는 건 포기하는 게 어때? 갓 태어난 망아지마냥 달달 떨긴.
494
모두에게 상냥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는 있다.
나는 그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모두가 내게서 등을 돌리는 건 아니다.
그러면 그 때 다시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
난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은 더 아니다.
그런 내가 내 취향이라 다행이다.
495
그래? 이해해?
좋겠다, 난 모르겠던데.
496
당신이 깨어나면 물어볼 것이 많다.
가까이 갈 필요가 없는데 왜 굳이 다가서야 했는지, 눈은 좀 괜찮은지, 내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는지, 상태는 어떤지… 의문점으로 가득 찬 머리를 다시 비우고 기다린다. 계속, 옆에 앉아서.
497
기다리는 건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각이 없을 때 가장 여유로울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만큼 편안한 건 없겠지.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은 곧, 당신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끝이 난다.
498
이건 어떻게 해야 낫는지, 낫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지, 애초에 낫긴 하는지. 늘 그렇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499
당신의 눈에 세상이, 내가, 어떻게 비칠 지는 알 수 없다. 나도 당신도 그것이 무서울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조금 더 두려울 수도 있겠다.
500
바보지, 완전 바보. 당신이 아니어도 걱정했을 거고, 당신이라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아니다, 평생 모르라지.
501
인식 장애는 참 어렵다. 혼자 다른 세계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인걸. 그 종류는 쓸데없이 다양해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만을 인식할 수 없는 것부터,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후 허구의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거부하는 것, 모든 것이 정반대로 보이는 경우까지 천차만별이다.
502
모든 인식 장애의 공통점은 「무언가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 기제」.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당신을 지키려 했는지 기억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503
호칭 따윈 아무래도 좋은 거야, 누가 보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지니까.
당신도 마찬가지다.
504
늘 모두에게 맞춰 주지만 이번만큼은 당신의 시선에만 맞춰 주려는… 조금은 하찮은 나름의 성의였다.
505
고정된 하나의 이미지와 존재 증명의 관계 여부.
존재 가치는 누군가로부터 부여받는 것인가, 스스로 정하는 것인가.
타인의 이미지만으로 자신의 존재가 고정된다면 그것은 정말 당신일까?
존재가 애매한 것은 과연 스스로의 탓일까, 주변 요소의 탓일까.
506
절망적인 현실. 기술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507
……뭐가, 뭐가… 뭐가 괜찮다는 건데…
왜 항상 괜찮다고만 해요, 방금도 당신이 말했잖아. 항상 낙관적인 건 아니라고.
이런 거였어요? 그게?
508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가 말릴 새도 없이, 붉은 바다로 날아오릅니다.
떨어지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공중에 떠 있습니다.
아무 제약도 없는 세계.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는 세계.
만끽하세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무도 없는,
영원한 자유를.
509
꿈은 뇌가 만드는 환상에 불과한 만큼, 쉽게 깨져 버립니다.
그러니 그런 유약한 꿈이 현실로 빠져나올 수는 없죠.
510
아마도 당신의 구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무엇을 바랐나요? 지금껏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어째서 그가 당신을 찾으러 왔는지, 이제는 알겠나요? 그냥 받아들여요. 이해보다는, 수용을.
511
단순한 유희로 무언가가 사라지는 건, 아무리 작더라도 슬프잖아? 사라지는 게 본인이나, 소중했던 거라면 더더욱!
그래서 꺼내 온 거야. 악의가 방해하지 않을 다음 기회를 위해!
512
여러분의 앞에 소중한 사람과, 기억까지 완전히 카피한 복제가 존재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원본을 무사히 찾아낼 수 있을까요?
무사히 찾아낼 수 있다면 가장 좋고,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도 그런 대로 괜찮겠지요.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요. 네.
513
역시 저 집은 마녀의 집이었던 거야.
역시 저 집은 마녀의 집이었던 거야!
소문대로의. 아니, 어쩌면 소문 이상의 두려운 진실을 알아버린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다시 일상을 보내야 좋을까요.
514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당신까지 위험해진다구요!
515
그 시신의 얼굴은 흰 종이로 덮여 있어 신원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로 보이는 낯익은 체구와 그 몸을 감싸고 있는 옷 등은, 그것이 바로 당신이 찾던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516
아직 살아있을 때 도착하셔서, 다행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당신도 이 곳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517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당신이 찾는 영혼이, 소중한 것인가요?
518
정말, 인간은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몇 번의 실패도 딛고 일어서는군요. 그만큼 소중했던 것이지요? …당신도 그런가요?
519
정말 사랑받았던 영혼이었군요. 마음에 듭니다, 당신도요. 오랜만에 좋은 것을 본 기분이네요.
520
…당신은 앞으로 영원히, 그가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겠지요.
아니, 아마도…
당신은 그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521
네가 내 존재를 덜 잊어버려서 내가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덜 잊혀진 기억의 무덤이라고 했지?
522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가능한가요?
무리더라도 괜찮아요. 자기 자신이 아닌 이상,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523
산만하고, 이상한 데서 사람 이야기 안 듣고! 이상하게 바보같고! 고집만 세고! 어휴! 답이 없어! 넌 십 수 년 내내 그랬어!
524
따뜻합니다. 인간의 온기입니다.
안긴 품은, 안심이 되나요?
525
글쎄요, 지옥이란 정말로 존재할까요? 단순히 괴로움을 형상화한 것이 아닙니까?
526
붙잡은 손이 따뜻합니다. 인간의 온기… 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차이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527
사랑에 이유는 필요 없어. …많이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시간 끄는 거여도 상관없어, 얼마든지 기다려 줄 테니까?
528
그냥, 끝까지 나쁜 인간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쉽네요.
529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걸로… 충분하니까. 부끄러워할 리가 없잖아요, 꿈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까지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530
감각이라고 해도 불쾌하고 아프고 괴로운 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따뜻한 것도, 말랑말랑한 것도 감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531
저는, 우리는… 함께 가기로 했잖아요. 절대 놓지 않아. 손, 잡고 있으니까. 따뜻하니까.
532
인간은 서로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생물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훌륭한 「인간」이군요.
533
내가 괴로운지, 괴롭지 않은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필요해, 절대로. 필요하다고.
534
괴로우면 천천히 가면 돼요. 멈춰 서도 괜찮아요.
535
당신의 사고 회로를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536
너는 내가 아니야.
너는 내가 아니야.
너희의 행복은 아니지.
너는,
너는.
537
우와아아아아……… 역시, 역시이, 이런 곳에 오면 기념품이겠지!? 그냥 게임이라면 집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것」 이라면…… 와아, ████ 군, 이것 좀 봐.
538
네 앞에 마주한, 너의 현실. 네가 나아갈 수 있는 너의 미래.
539
……나야말로, 오늘 하루 동안 즐거웠어.
자, 이제 가야지?
네가 돌아갈 곳으로.
내가 돌아갈 곳으로.
540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나만. 「선배」로서, 하나만…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541
인간에 다가선 걸 축하드립니다.
542
세계는 여러분을 위해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543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멈춰서는 건 정말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내일을 향해 걸으세요.
544
그 과정은 대가, 희생, 이별의 고통을 겸합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신조차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 곳은 천국이 될 수 있어요.
545
하? 멍청하고 오만한 건 너야, 절망.
정말이지, 항상 있는 일이지만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네 두개골에는 뇌 대신 지방이라도 채워 놓은 거니?
여신의 반쪽? 웃기지도 않는 말은 그만 두렴. 나는 이미 그대를 버렸단다. 그대가 말한 대로, 눈 뜨고 못 봐 줄 정도였으니. 망가진 인형을 그대로 갖고 있을 정도로 나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그럼, 잘 가렴.
546
이른 새벽녘의 하늘이 여러분을 반깁니다. 하지만 계속 바라봐도 태양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마치 실험용 상자 속 그림과도 같은 위화감임에도, 여러분은 이곳에서 현실을 느낍니다.
547
모든 것이 멈춰 선 듯한 주변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548
그래도 나는 여기 살아 있으니까.
549
부탁이니까 제발 괜찮다고 하지 마세요, 네?
마지막까지… 어떻게 마지막까지 남 생각만 하고 그래? 그러면 안심할 거라고 생각해요? 멍청해, …이렇게 피가 나잖아요. 누가 봐도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얼른, 아프다고 한 마디만 해 달라고요… 안 괜찮다고 해 주세요, 나는 안 괜찮아요… 선배…? 선,
550
얼마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세상에 보이는 것이 죄다 무서워지는 때에도 의지할 무언가조차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551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에 대해 나 스스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 흐르듯이 바뀌는 걸 어떡해.
552
나는 왜 사람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지 못하는 걸까.
553
안 그런 것 같아 보이면서도 은근히 부지런했던 그는 이른 새벽, 하품을 뻑뻑 하면서도 잠서나 식사 준비를 하고는 했다. 덕분에 그보다도 아주 조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긴 당신이었지만, 그냥 가끔은 늦잠 정도는 자고 싶겠지.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당신은 지금, 죽도록 후회하고 있다.
당신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의 늦잠은, 평생 이어질 잠이었다. 축 늘어진 그를 안아든 당신과 그 둘만이 조용했다.
554
당신은 그가 가끔, 아무런 일이 없더라도 태연한 투로 죽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마다 언제나 그를 꾸짖었던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항상, 살짝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사과를 했다.
555
모두가 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치 그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 따위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처럼.
556
죽음을 당신에게만 말했구나. 당신에게만 말할 수 있었던 건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던 건가. 그제서야 당신은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그가 죽음을 고른 데에 이유 따위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굳이 이유라는 것을 붙이자면 「그냥」.
참 부조리한 소리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 결과는 당신의 품에 싸늘하고 무겁게 안겨 있다.
557
그는 ████의 말에 조금 미소를 띠었다.
마치 그의 딸이나 손녀가 잠든 걸 바라보는 것처럼, 잠든 사이에 친구들이 선물을 챙기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정말 아무렇지 않게 모두가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하고 있다. 그가 그저 오랜 잠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558
그들뿐 아니라, 이 저택의 전부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비정상적으로 얻은 두 번째 삶으로.
모두들 미쳐 있다고.
559
당신은 그저 작은 손으로 ████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 차가움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가 다시 깨어났을 때, 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당신도 결국 모두와 같다.
560
그래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기뻐할 일입니다.
이런 멋진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561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 주진 않지만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립 좋지, 단단하게 혼자서 다 해내고, 혼자 걸어가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그렇게 살았더니, 언젠가 힘이 부쳐 부러져도 계속 혼자서 걸어야 했습니다.
부러진 끝은 날카롭지만 그래도 단단해 보이니까요.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끝에 찔리거나 베이지는 않을까 하고 피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나는, 얕보이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싫어서 일부러 날카로워지는 것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나도 다가가는 것이 무섭습니다.
562
늘 나는 내 일을 남에게 말할 때 「아 이건 별 일 아닌데…」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정말로 별 일이 아닌 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했을까요? 되돌아 봐도 그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563
이윽고 귀를 찌르는, 익숙하고 그리운, 모두가 그렸을 목소리가……………
「당신들, 내 시체로 뭐하는 짓이야?」
그것을 반길 틈도 없이, 당신은 비치는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매서운 시선을 마주한다.
익숙하고 그리운 ████가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정해왔던 ████의 죽음을,
████ 스스로의 목소리가 지금,
인정한다.
564
걱정하지 마, 당신도 똑같으니까.
565
당신을 가장 좋아했던 그였기에, 그 누구도 당신이 ████의 시체를 돌보는 것에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것은 당연하게도 서서히 썩기 시작했다.
퀴퀴하게 도는 악취가 당신과 그들을, 지금까지 부정해 왔던 현실로 되돌려 보내려 하고 있다. 당신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할 일이다. 그도 그럴 게, 당신들이 보기에 ████는 그냥 잠들어 있다.
잠들어 있으니까, 움직이지 않는 것 뿐이라고.
566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이 있다. 고금동서 모든 삼라만상의 진리. 그것을 몰랐던 건지는 알 바 아니지만, 당신들은 그가 있을 때 소중히 하지 않았지.
567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신들과 인간의 구조적인 차이.
이러한 감정은 전염된다는 것이다.
568
「네, ████.」
늘 여보세요, 대신 말하는 이름 넉 자는 그의 이름이 확실했다. 그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어딘가가 이상했다.
무언가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멍해져 굳은 당신이 든 수화기 너머로 그 익숙한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음… 그 쪽 직원도 참 고생이네요, 얼마나 갈궜으면 2주나 결근하지?
뭐어, 잘 찾길 바랄게요! 그럼.」
그저 그것뿐인 이야기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른다.
569
당신들 중 누군가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70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혼자 멋대로 잊혀지는 게 어딨어? 죽을래?
571
그는 아무 말 없이 괘종시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끼릭끼릭, 톱니바퀴가 헛도는 소리가 이곳 특유의 정적을 빼앗기도 했다. 그리고 울리는, 바닥에 금속이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와 함께 그는 연장 하나를 떨어트렸다.
장인의 물건은 하나하나 그의 손에 익을 대로 익은 것들뿐, 떨어트렸다 해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줍지
않는다.
572
가을은 저도 좋아해요. 생일이 가을이기도 하고, 당신이 좋아하기도 하고.
573
화려하거나 파란만장한 과거 같은 건 없다. 큰 실수도 실패도 사고도 굴곡도 없다.
574
예측하기 어려울 행운의 가호를 받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세계가 흘러가는, 반칙적으로 매끄럽고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게 전부다.
575
네 번의 실패,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실패하면 우리 갈라서자, 너무 무리했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 그녀는 조금 작은 손을 얹었다.
576
기적같은 성공과 작게 고동치는 생명은 그들 부부의 인연과, 그들이 원하던 것을 모두 이루어 주었다. 인공적인 과정 따위 아무렴 어떤가. 분명히 두 사람의 유전자가 섞인 그들의 아이이며, 엄연한 인간이다.
말 그대로 그들의 「희망」이었다.
577
주어진 것은 부족함 없이 모두 완벽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유효하게 써먹느냐, 그것만이 문제다.
이제 겨우 20여년을 살아 왔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는 늘 말한다. 평범한 게 뭐가 어떠냐고.
평범하기가 가장 어렵지 않은가.
578
지하철 선로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579
초인종 누르면 문 열어줄 것처럼 생긴 곳이었다.
580
작고 약하고 어리지만 저는 제가 원할 때, 마지막까지, 노래해요. 제 목소리가 들린다면, 답해 주세요.
581
████라는 인간이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늘 생각한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순 없어도, 적어도 타인에게 조금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582
세상엔 참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으니까요. 「소설보다 현실이 더 이상하다」 란 말도 있겠다, 뭔들 없겠습니까.
583
사랑해요, 라고 몇 번이고 말해 본다. 당신이 듣고 있든, 아니든, 짧은 다섯 글자에 온 마음을 담아 본다.
584
1년 전 오늘, 마지막까지 결국 전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 와서야 전해 본다.
1년 전 오늘, 짊어질 후회를 스스로의 이 말로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1년 전의 그것이 내 착각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현실도피를 하고는 한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과, 당신의 생일 하루 전이라는 너무한 타이밍.
585
손에 닿는 체온이 무기질하든, 심장 소리가 인공적이든, 뭐가 됐든 「당신」이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하루하루를 감사히 살아간다.
당신이 당신을 그만두지 않은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그런 당신에게 의존을 한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이거면 됐다.
586
가을이 물씬 다가왔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계절이다.
587
그리고 점점, 그 날은 다가온다. 행복해야 했을 그 날. 그리고 비정하게 지나갔었던.
그래, 당신이 없던 정적의 시간은 지나갔다.
목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밀어넣었다. 어쨌든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고 당신은 이 곳에 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이제는 놓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외로움을 타는 날 위해서도.
심장은 뛰고 있다, 우리는 살아 있다.
그걸로 됐다.
588
1년 후의 나는 또 다른 마음으로, 이 날을 맞이하지 않을까.
심장이 멈추지 않는 것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변함없겠지만.
그렇게 당신의 새로운 생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589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하고, 다시 동지들과 만나게 된 걸 축하하고, 일단 오늘 밤은 푹 쉬고 내일 모두에게 인사하도록 해요.
590
난 그냥 이 곳에 여러분과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걸로 만족하거든요.
591
안아도 돼, 다 괜찮단다! 아마도.
592
음… 그건 틀렸어, ████. 내가 어딜 가더라도 따라 와야지. 안 그러니? 내가 당신을 버려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뭐어, 그래. 걱정하지 마렴.
593
응, 당신이 부서질 때까지 응원할게요!
594
…아냐, 괜찮아. 걱정할 건 당신이야. 그렇다고 해서 너무 「우리들」을 걱정시키는 건 아마도… 그리 기쁜 일은 아닐 거야.
595
과거는 과거고 꿈은 꿈이니까요. 꿈은 한 순간일 뿐이에요.
늘 생각하지만 「지금」 당신의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로요.
596
꿈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일은 저도 자주 있거든요…… 그래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요.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진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요. 분명 힘이 되어 줄 거랍니다, 언제나요.
597
확신할 수 있을 날까지 응원해요. 별 말은 아니지만… 이걸로라도 기분이 나아졌다면, 많이 기쁠지도.
598
문득 언제 갑자기 죽어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은 역시 항상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아야 되지요.
그래서 내일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599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게 언제까지 이어지는 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 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미래일 것 같네요.
600
가끔 그들이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혼자 남겨지는 기분은 좋아할 수가 없는데, 백여 년은 떨어져 있어도 이건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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