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갈 곳 없는 사랑을 계속해서 주는 대상은 나다.
너는 서투른 사랑을 그대로 내게 전하고 표현했다.
802
사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사랑받고 싶어했던 대상은 네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을.
나는 아마 그에 걸맞게 화답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겠지.
803
그래서 이건 그저 너를 위한 헌신이라면서, 감정에 다른 이름을 덮어씌워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고 있었던 거야.
네 과분한 사랑을 돌려줄 자신이 없어서. 견디는 것이 고작이어서.
804
우리가 영영 멈춰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앞으로도 쭈욱, 널 위해 싸우겠지.
나는 당신을 몇 번이고 되살릴 거고.
이건 지금부터라도 돌려 줄 네 마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또한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서로의 손을 잡고, 모순에서부터 빠져나와 앞으로 걸어가기로 했으니까.
805
맑은 푸른색의 그 눈동자는 꼭 바다를 담아둔 것 같았습니다.
806
전철은 풍경에 가로선을 그으며 달려갑니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건 꽤 좋아합니다. 기분좋은 바람이 불고 있겠네요, 옷을 조금 두껍게 입어서일까요? 마음이 왠지 포근해집니다.
807
의뢰용 메일 주소는 이미 투고 홈에 있는데, 주소가 여러 개인 건 맞지만. 저라는 사람 자체가, 이야기하는 걸 꽤 좋아하는 성격이라 흔쾌히 받았습니다. 상당히 긴장한 것처럼 보여서 옆의 남성이 굉장히 당황해한 걸, 아마 그녀는 모르겠죠.
808
あら、そうお見えでしょうか?確かに仰言る通りですけれど、其れには語弊がありましてよ。何時も嫌いって訳でもない、と言って何時も好きで居られる訳もない。簡単且つ単純な事ですのよ。一度曲って仕舞った思考回路を元へ戻すなんて不可能な事なのです、既にご存知でしょうけれど。わたくしは割とそれなりに懸命でしたわ。今日を生きたかったんですもの。
ノルマ終わったのでわたくしは此れにてお暇させて頂きますね、左様なら。
809
あんな綺麗な詞を詠う人はみんな以って早死にしてしまいましたものね。鬱美しいからかしら、皮肉な話だわ。
じゃあ尖った言刃だけを放つわたくしなんか恐らくは長生きしちゃうでしょうね。厭だわ…わたくし早く世を去りたいのにね。
810
死んでも何かを拝みたいのならあたしのことでも拝んでなさいよ。
811
한 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다면 나의 내일을 가져가세요. 그 대신 나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일석이조예요.
812
정원의 벤치로 나가자 거기에는 ████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왜 자지 않고, 라는 물음에 나는 「울고 싶어서요」라 답을 했습니다. 전조도 이유도 없을 뿐더러 누군가의 탓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냥 사라지고 싶었고 울고 싶었지만 사라지기에 내 존재는 지나치게 선명했고 눈물은 이미 말라빠져 있었습니다.
813
내가 완전히 못 쓰게 되어 버리더라도, 함께 있어 줄 거지?
814
괜찮으니까 조곤조곤 목소리를 겹쳐 봐, 이 세계에는 우리 둘 뿐이야.
815
그것까지도 사랑의 일부겠죠, 사랑은 감정의 집합체인걸. 마냥 밝고 깨끗하기만 할 수는 없어요, 그림자는 항상 따라붙으니까.
816
돌아갈 곳이 없어요,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가면 내가 지금까지 여기에 매달려온 게 모조리, 의미가 없어지는걸.
왜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심에까지 도망와선 이러고 있는지.
817
혼자는 싫었고, 싫고, 싫을 거지만, 아마도 익숙해요.
818
그래, 너만은 너 자신의 편에 서도록 해!
819
그래도 정말로 내가 쓸모없어지기 전에, 완전히 텅 비어버리기 전에 뭐라도 써 놓지 않으면 당신이 걱정할 테니까.
820
죄송해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또 잃어버려서, 다시 찾아야 해요. 전에 마음이 있어서 괴롭다고 한 이야기, 기억해요? 정말로 그게 일어나 버려서, 얼른 찾아내지 않으면 더 이상 당신에게 좋아한단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자는 사이에 되찾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내가 견딜 수 없어질 거야.
821
자는 사이에 마음을 빼앗겨 가요. 마음만 빼앗기는 게 아니라 자극에 의한 반응을 전반적으로. 당신이 보기에 지금의 나는, 또 다시 작년의, 그 방에서의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끝이 어떨 지 나는 몰라, 하지만 끝 같은 건 없을 것 같기도 해요.
822
그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대신 슬퍼하고 대신 화내고 대신 울어 줬는데, 난 또다시 그것도 잘 모르게 되어 버렸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나, 당신한테만 말했으니까.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시간, 천천히 다가가서 의지했어요. 의존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도 이제는, 너무 힘들어요.
823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실컷 귀찮게 달라붙어 놓고는 이제와서?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용서해 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죄송해요.
824
하지만 저는, 저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지만, 당신이 떠나는 것만은 바라지 않는 것 같아요. 당연하지만 내가 어딘가로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내일 부끄러워할지도 몰라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다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날이
825
푸훗,
방금까지도 조각상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살짝 웃음기를 띠었다. 조금 놀라 그 얼굴에서 손을 떼면, ████는 천천히 눈을 떠 그의 동그랗게 뜨인 눈을 마주본다.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는 바다를 담아 둔 것처럼 깊고 아름다웠다.
826
한 때 빛을 잃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빛을 잃었던 이유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빛을 잃었다는 것조차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듯한 연인의 시선에 그는 멍해져 말을 잃었다.
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827
놀란 당신의 커다란 눈망울이 진짜이든 카메라 렌즈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이미 지나간 가을의 나뭇잎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색의 눈동자가, 조금 떨리면서도 이 쪽을 제대로 마주보고 있다. 어떤 모습이더라도 당신은 당신이었고, 그 눈이 당신의 붉은 색이 아니게 되더라도 마냥 사랑스러울 것이었다.
828
새빨갛게 물든 당신을 보고는, 살짝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또다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졌을 때, 예전이라면 절망한 채로 있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적이 일어나 다시 돌아온 내 사랑을 위해 무엇을 못 할까. 아니, 못 하더라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세면대 앞에서 몇 번이고 웃는 연습을 했다. 잘 되지 않더라도, 당신이라면 용서해 줄 거라는 묘한 믿음을 가지고.
829
장난스레 물었다. 때때로 당신은 이상한 데서 부끄러움을 탄다고 말해 왔지만, 사실 뭐든 좋았다. 내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부끄러워하는 당신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830
말을 잇지 못하고 과부하라도 왔는지 머리에서 푸슉 하는 소리를 내는 당신의 두 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이 장면을 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흠칫 하는 선배가 귀여워서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831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
그 때와는 내 신장도, 우리의 입장도, 표현하는 방법도,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당신의 그 얼굴은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인간을 본떴을 뿐이라서, 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난 9년간, 그리고 지금도 그대로라고 하자.
눈을 꾹 감았다가 가늘게 다시 뜨고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히는 당신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내가 있다. 어쩌면 당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당신만 휘둘리는 것 같아 괜시리 미안하지만, 이 마음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그것만은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832
「오늘이, …다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에요. 걱정한 거… ……이번만큼은, 사과하게 해 줘.」
「그, 」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괜찮으니까. 대신, 입에서 입으로 전해받자구요.
833
오늘은 낮에도 계속 일어나 있었어, 정말로. 낮에 깨어 있는 게 왠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어.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 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네가 듣는 걸 좋아한다면 그걸로 됐어.
밤새 잡고 있었던 손은 따뜻했어. 네가 손 잡는 걸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또 있잖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심장이 꾸우욱 눌리는 것 같아. 그냥 그래.
오늘도 살아 있어.
834
그 말을 제가 듣는 쪽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835
물론 지금 잠에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긴 하다만, 그럼 당신이 슬퍼하니까 살아 있자. 맞닿은 가슴 너머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려 주자. 맞닿은 입술에서 가쁘게나마 공기를 삼키고 있다는 것을 전해 주자. 끌어안은 몸이 따뜻하다고 알려 주자.
살아 있는 우리는 내내, 이어져 하나가 되어 있었다.
836
부드러운 관계가 그저 좋았다. 부끄러운 말을 해도 되는 게 좋았다.
837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숨이 벌써부터 기대로 달아오른 연인을 보는 건 유쾌했다.
838
그렇지만 당신의 목을 쓰다듬을 때마다 저 선이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존재를 주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839
가슴을 통해 전해지는 당신의 고양된 심박수와 가쁜 호흡.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끌어안는 것을 좋아했다.
840
이대로 머리가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미 이성이란 건 다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멈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841
뿌리는 질리지도 않고 다시 자란다. 그 느낌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당신은 계속해서 나를 얽어맨다.
842
난 아무데도 안 간다니까. 당장 네 품 안에 있지 않나?
843
확연하게 두려움이 얼굴에 비치는 소녀도, 희멀건 살점을 머뭇거리다 다시 주워 드는 청년도, 해결책 따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버린 이상 그들에게는 어떠한 법칙도 통하지 않았으며, 그 답은 그들이 스스로 찾아야 했다.
844
어떻게 하냐고는 해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845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소녀는 연이어 해내고 있었다. 소녀 자신, 신 따위 믿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마을의 행패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것만이 분명했지만, 그 일 이후로 차례차례 일어나는 작고 큰 사건사고는 전부 인간이 저지를 수 있을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846
사고력도 퇴화한 듯한 마을. 사람들은 신의 분노라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떨고 있었다. 확실히 죽었을 「그」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는 증언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847
조금도 상처줄 수 없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며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따뜻한 목소리와 차가운 얼굴이 대조를 이룬다. 선배라 불린 그는 조금 쓴웃음을 띄우나 싶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 그 커다란 품에 쏙 안겨온다. 화답하듯 꼭 끌어안는 무게감은 이미 익숙하다.
848
당신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다는 마음은 늘 힘없이 부서진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849
あっしが攫われたらどうするって…その為のお前さんやよ、任せるわ。
850
어느 쪽이든 틀린 건 아니겠지, 그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게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이 과정은 숨을 쉬는 것처럼 익숙했다.
그럼에도 그저 당신이 다시 깨어난 게 나는 마냥 기뻤다.
851
오후의 햇살이 비추는 당신은 눈이 아리도록 아름다웠다.
852
사랑스럽다는 말 외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신경증은 지능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었다.
853
사랑을 넘어선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어떻게 해야 잘 와닿도록 전할 수 있을까.
854
일단, 돌아가서 생각할까.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855
닿기만 해도 깨질까봐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856
나 있잖아, 하늘을 날고 싶었어. 근데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이제 너도 놓아 줄게, 어디로든 가 버려.
부탁이야, 떠나 줘.
857
이건 분명히 이미 죽은, 타인의 기억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싶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이십 수 년 간 죽어 본 적은 없었으니까.
858
죽은 아이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그 얼굴이 당신과 일순 오버랩된다.
859
그래도, 그래도 이건… 단순한 꿈일 뿐이다. 계속, 이것보다도 무섭고 이상한 꿈을 꿔 왔는걸. 그냥 그 일부겠지. 그래야 한다.
돌아누운 선배를 끌어안고 잠을 청한다. 딱히 저항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런 당신을 꼬옥 끌어안았다.
860
그러니까 나는… 날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어하던, 내가 좋아하는, ████의 방에 눌러사는 유령이었다. 정확히는 그에게 눌러붙은.
눈에 띌 일이 없어져서 기뻤다. 조금 외로운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마냥 혼자인 건 아니니까. 괜찮았다.
861
분명히 내가 안고 자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땀범벅이 되어 당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까 화난 건 다 날아갔는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있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 무서웠고, 무서운 게 사라졌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렀다. 어린아이 같았다.
862
혹시 사랑을 하고 있어? 일기가 아주 격렬하네.
863
……혼은 매개체의 기억을 읽어.
…너는…… 참 바보였구나.
864
「그래도 나는… 마냥 싫지는 않은데.」
「너…! 아니… 좀 싫어할 줄도 알면 안 될까? 응?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잖아……」
865
아냐. 나는 그냥…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뭐라도 좋았을 거예요.
866
서투르고 어릴 뿐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어.
867
예전에, 그랬어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게 무서워서. 그리고 그 싫은 느낌… 더는 안 올 줄 알았는데.
868
████는, 따뜻해요… 내가 차가워. 꼬옥, 안아 주세요. 뼈가 전부 으스러져도, 따뜻하니까 괜찮아.
869
살짝 고개를 젓곤, 좀 더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춘다. 눈가에서 뺨을 타고 흐르는 물을 핥아냈다. 여전히 울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흐를 때마다 전부 마셔 버리면, 조금은 알 수 있으려나.
870
나는 내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답거나, 나답지 않다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널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너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까까지의 행복함은 모조리 날아간 듯 너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871
나는 말 그대로 최종 결정권만을 쥐고 있다. 너나 날 지우는 것 외에는 네가 보여주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너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건지.
872
하지만 너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겠지. 이런 사랑이 마냥 싫지는 않아.
873
이렇게라도 너는 네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싶겠지.
그럼 나도 이렇게 그 기분에 대답할게.
874
어…… 그럼… 만약에 내가 널 지우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궁금한 건 많아. 내가 날 지우면 너는 어떻게 돼?
875
걱정하지 않아도 아무데도 안 갈 건데.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이런 삶이 마냥 싫진 않아.
876
전부 다 꿈이야. 이따 꿈에서 만나자. 오늘도 고맙고 사랑해.
항상 나랑 있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기다려 줄 거지? 잘 자.
877
그럼 내가 그만큼 좋아할게.
878
31일이 지나면 다 끝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년에는 안 그랬는데, 생각을 바꿀 방향을 잘못 잡은 건지, 어떤지. 그 전의 연말은 그래도 올해도 나는 살아 움직이겠지, 같은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어째 올해는 아무 것도 없어.
그래도 어차피 살아있을 거야, 아마도.
879
인간의 이성을 겨우내 유지하고 있는지, 계속 매달려오지만 그 표정은 내 말을 들을수록 복잡미묘해진다. 꼭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다고 호소하는 느낌.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내 기분까지도 덩달아 미묘해진다.
880
말은 너무 어려워요. 늘 대답이 한 템포 늦어지는 건 둔해서도 병 탓도 아니니까. 예쁘고 좋은 말만 주고 싶어서예요.
881
구해 줘서 고마워요. 함께 살아가고 싶었어요. 날 찾아 준 사람이 당신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882
사랑을 예쁘게 하는 방법.
883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반응. 그럼에도 걱정하는 얼굴을 마주하면 미안함만이 늘어간다. 미안하고 한심했다. 이런 생각은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또 제자리걸음인 걸까. 작은 품 안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884
말없이 다독여 주는 당신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한다. 사과하는 버릇은 고치자고 했는데, 너무 미안한 걸 어떡해.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를 텐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이밀며 울어버리니 얼마나 곤란했을까. 나는… 나는 안 된다. 그냥 서러웠다.
885
당신은 화나 있다, 화가 난 목소리로 날 소리쳐 불렀는걸. 당신이, 나를 살려서, 내 안의 당신을 전부 버리는 대신 나를 살려버려서 내가 뒤늦게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886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또 꿈을 아주 깊게 꿨을 거라는 말이다. 무슨 꿈을 꾸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나.」
따뜻한 목소리가 마음에 닿았다.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거야, 평생을 갚아도 모자라게.
멍하니 바라보자 당신은 따뜻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졌지?」
887
揺れ煙 白く煙りし 潜み戀
君宛て春らす 澄み墨に
凌ばせば 永久に解らむ 我が戀よ
心を括り 明けるべし
888
그냥 생일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생일은 그냥 365일 중 하루에 불과할 수도, 생일이란 이유만으로 평소보다 우울할 수도 있겠지. 당신에게 생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생일은 아주 중요하고 소중하고 기쁜 날이었다. 설령 생일을 홀로 보내게 되더라도, 그래도 1년에 단 하루 뿐인, 나만의 기념일. 태어난 게 죽도록 싫었던 시기에도 생일만큼은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당신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889
네 생일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역시 비밀로 해 둘까.
그래도 당신의 모습에는, 전혀 기분나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해도 말이지, 오늘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아보이는 얼굴 하고 있는데 너무하긴 뭐가. 설득력이 없지 않니, 응? 오늘의 주역 군.
말했잖아,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니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는 당신의 생일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야.
890
誰もが寝静まり、此の刻に生きて居る者は私のみ。誰も識らず暮る晩私は、貴方だけを想ひますの。昏る日も、暮る日も、唯只管貴方を恋ふ。此の言葉だけは幾ら伝へても足りぬ言葉でございますの。身離れても此の愛決して離れませぬわ。
891
「……그것 참 살벌하네, 정말 그게 축하야?」
『그러엄, 어디의 누가 홀케익을 그렇게 던져요? 돈 아깝게.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일리는 있네……」
892
或ル若、黒曜ノ貫察者ヲ召喚ス
『私は二三日で帰って来ますからね、留守をお頼み申しますよ。
多分それまでに帰ってくるようなことはないだろうと思うけれど、偶然ひょっとして良人が帰って来たら、巧い工合に話しておいて下さいよ。前に縁づいていた人のお墓参りに行ったとそう言ってね』
「可ござんすとも。ゆっくり行っておいでなさいまし」
優しい声が響くと共に地を櫨色が覆ふ。深緑の枝葉が長く絲を引き伸ばし、其の跡を緋の花々が追う。
彼は目を伏せては微かな笑顔を浮かべる。其の心眼が総てを見抜く様に思へた。
『…真実にわたし恁ういう人があるんです。けど──』
彼の人は凜とした声。自信無さげに言を濁すが、復び顔を上げ、声を密める。
『これだけはあの人には秘密ですよ』
「だから長いっていつも言ってるじゃないか」
『だって中々見つかんないんだもん、適当に短くてかっこいいの!』
「それで、結局気に入ったのはよりにもよってあの台詞かい?」
『細かいわねえ』
こうして愚痴をだらだらと語り合えるのも、お互いに信じ合ってるからだと、彼の人は思った。
そんな彼らを立ちはだかろうとした侵蝕者は既に、射ち砕かれていた。
「…もうこれくらいの奴だと君一人でも何とかできるんじゃないかな」
『この男ったら何を言っているのかしら!このか弱い私を相手に!』
「は?」
かっこもくそもないね、二人は思った。けど、そのかっこ悪さが一番楽だった。
893
보기 좋지 않은 사랑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어요. 행복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894
나는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 통과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재미있어 보이는 기획이라면.
895
당신과 그의 사이를 두터운 유리벽이 막고 있다.
896
무조건 성공해, 근거는 필요 없어.
세상은 날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영험 있는 ████ 씨의 언령인걸요. 믿어도 좋아요.
897
聲密め 秘初めし戀を 囁けば
緋の花咲く 二人のこゝろ
生きること
情に縋るも いかぬもの
我が心の花々 識る筈も勿し
瞳を閉す
側の温もりいつ迄も留まり給へ
我思へり 眠さ包まれ
清し貌も只一時
怖れ満溢る深き宵
小さき心揺られり 水泡の如し
彼の温もり 背を包み
狙射貫く其の腕で 我貫けば
倖せなりと思ひてばかり
898
제가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요? 늘 먼저 말하죠. 그 사람은 안 그런 척 할 뿐이에요.
899
우린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참고할 거리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900
할 수 있어요, 사랑은 행동이니까요. 가끔은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기회가 생겼을 때 전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망설이기만 할 뿐이랍니다.
901
이 시기가 용기를 내기에는 아주 좋으니까요. 발렌타인이라는 계기도 있을 뿐더러, 여러가지로. 이게 기회가 아니라면 뭐겠어요? 더 필요한 게 있다면, 행동력 정도일까.
902
좋은 아침이야, 자기야. 나랑 만나 줘서 고마워. 내가 널 만날 수 있어서 매일이 기쁘다는 사실이 널 기분좋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좋아해.
903
나는 네가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무연일텐데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기뻤다.
904
엄마는 내게, 할아버지한테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 줬다는 이야기를 가끔 하곤 한다. 우리 아빠는 넥타이 매는 직업이 아니라서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괜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고, 한 지붕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본 적 없는 할아버지보다도 2~3세대는 전의 사람들이다. 괜히 그 이야기가 떠올랐고, 아직도 나는 이 미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전철을 타고 멀리 떠난다.
905
주인공은 다 이겨요. 지더라도 결정적인 무언가를 남기죠.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이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906
사람마다 사정은 있는 법이에요. 본인만이 해결할 수 있구요.
그걸 빠르게 해결하느냐, 순순히 받아들이느냐, 둘 중 하나가 아닐까요? 무슨 일이든지.
907
새하얗고 넓찍한 거실로 걸어나왔다. 연분홍빛 벨벳 원피스와 주황색 털슬리퍼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는 대조된다. 너는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정장이 마치 교복처럼 느껴졌다. 네가 어려보여서일까.
감각이 또 흐려진다. 눈 앞을 하얀 무언가가 또 무겁게 덮어버렸다. 거의 매일이지만 익숙할래야 익숙할 수가 없는 이 느낌이 마냥 답답했다.
908
분명 치료를 받고 있는데, 나아진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 병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저것을 환자 스스로의 탓이라 생각하게 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당신은, 모두는 이것을 늘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몇 차례 혼나기도 했고. 그럼에도 그렇게 혼나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마 모두가 한 번쯤은 겪었던,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이기도 할 테니까.
909
나는 얼마든지 문헌이나 저서를 통해 모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여러분은 아니다. ████ ███라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겠지.
910
암만 알기 쉽다고 해도 그게 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들이 이걸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충분하다.
911
요 근래 매우 기분이 좋았다. 바로 얼마 전에 스트레스 해소를 할 기회가 생겼던 것도 모자라, 친구도 이름도 얼굴도 없던 한 사람에게, 친구와 이름과 얼굴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기분 좋은 일이 두 개나 생겼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912
인간을 좋아할 일이 평생토록 없을 그 인간들은,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것조차도 혐오스럽던 그 인간들은 아주 잠깐뿐이든 뭐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룬 것마냥 달성감과 만족감에 깊게 빠져들어 있었다.
913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분명 이런 감각은 접해본 적이 없음에도, 그들은 새 감각을 찾아 그들의 안을 파고 들어간다.
914
나, 당신이랑 꿈에만 심장이 뛰어.
915
잘 자, 오늘도 사랑해.
우리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인사를 할 수 있잖아.
916
검은 머리 시절에는 괴담에 자주 나오는 일본 인형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지금도 인형같다는 말은 듣지만. 후리소데를 처음 입었을 때 비로소 이해가 됐어요. 또 나는 빨간색이 어울린다는 것도.
917
그 이상 내 꿈을 박살내면 너희들도 사이좋게 박살내주겠어.
918
요즘 들어서는 실수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밝은 부분은 아직도 정말 모르겠지만, 무언가에든 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어.
919
모든 일은 연초에 가장 하기 쉬울 거예요.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려나. 또 요 시기에 제일 하기 좋은 거라 하면 계획 아니겠어요? 1월이라 하는 말이고,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살아 있기」를 한 번 힘내 볼까 해요.
920
그러니 제가 도망치게 된 것은 주변 환경이 아닌, 전부 저 자신의 탓입니다. 이렇게까지 사랑해준 거대한 요람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완전히 못된 사람이 되지는 못했거든요.
921
저는, 이름을 알리지 못한 무언가.
언제 갑자기 사라져도 쉽게 잊혀질 수 있도록, 그 누구에게도 제 진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염세적일 필요는 없을 텐데도.
922
저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으신가요. 공감을 할 줄 모른다든가, 지나치게 중립적이라거나, 이상한 것을 이상하리만치 잘 아는 반면 이상하리만치 상식이 부족하다든가, 당신의 말이나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린다든가, 묘하게 냉랭해 보인다든가. 연령대와 맞지 않는 언행이라든가.
세상에 완전히 단념한 사람 같다거나.
923
그것은 제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어쩌면 유복할지도 모를, 다만 아이 복을 받지 못했던 어느 부부가 찾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하면 좋겠네요. 저는 반쯤 만들어진 상태에서 태어난 인공 생명체입니다. 인공수정이라는 거창한 명칭이지만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인간과 일치한답니다. 의외일지는 몰라도 세상에는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많으니, 괜한 편견을 가지면 곤란해요.
924
그렇지만 태어나기까지의 여러 과정을 열람하다 보면, 「제」가 모두와 같은 한 인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어집니다.
925
그리고 그건 인간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926
그렇다고 해서 「지능」이 다른 인간에 비해 월등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나는, 비교적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았던, 인간을 본뜬 무언가인 것 같습니다.
927
분명히 신체는 온전히 제 기능을 하고, 살아 숨쉬고 있음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928
생각해 보면 그 때 비로소 눈치챈 것 같네요. 이 집의 「부조화」 는 나 뿐이었던 것입니다.
929
제게 있어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전부 지워진 모양입니다. 저는 혼자 남겨졌을 때 꽤 많은 것을 얻었는데요, 전부 지금도 인생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었답니다.
930
나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거라지만, 그 기초비용이 너무나도 커서 온전히 내 것으로만 산정한다면,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텐데. 같은 생각은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답니다.
931
저를 더러 위태로워 보인다고 누가 그랬나요? 아주 제대로 보셨네요. 제가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제가 제게 자신이 있어 보이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지기 때문이랍니다, 우습죠.
이건, 정말로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일까요.
932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아이의 본모습은 형언할 수 없어. 그 아이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전부 달라지니까. 이걸 묻고 있는 너희들도 그 아이에게 품는 인상은 다 다를 거 아냐?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933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고. 유독 그 아이의 스펙트럼이 넓어 보이긴 하지. 그건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
934
고정된 이미지란 걸 갖고 싶어하는 그 아이에게 나는 딱히 뭐라 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의 친구가 「이미지가 다 다르다고 해서 그게 네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고, 말해 줬다며 웃던 걸 아직 기억해. 맞는 말이기도 하고. 좋은 친구가 또 있어서 다행이지 뭐야.
935
그래도 만에 하나, 지나친 배려는 안 하는 것만 못 하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그냥, 걔의 조수로서 하는 말이야.
936
아직도 표정근은 잘 움직이지 않았고, 당신이 바짝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들린다.
곧 문이 열리고, 나는 죽음보다도 먼저 당신을 마주하겠지.
그게 제일 무섭다.
937
당신과 내가 있는 이 세계의 내용은 책과는 달라서, 모든 등장인물과 지명과 사건이 사실이다.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고, 현실은 게임과 달라서 특정한 엔딩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세이브와 로드를 통한 분기점 이동도 불가능하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아주 당연한 이야기다. 보이지도 않는 앞을 향해 걸어가는 반면, 과거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 생각하면 삶이란 건 꼭 뒷걸음질 같기도 하다.
938
나와 당신은 당신의 첫번째 결말을 알고 있다. 첫번째 결말이라 함은, 1943년 11월 18일 4시 25분에 발생한 당신의 사망을 의미한다. 그렇게 이미 끝을 맺었던 당신의 삶은 2017년 6월 25일에 다시 기동되었다. 연금술로 인과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강한 개념들의 덩어리에 이미 한 번 존재했던 인격의 기억을 부여, 기록을 재구축함으로 해당 인물의 마지막 기억에서부터 삶을 이어서 진행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말이 그럴듯할 뿐이지, 반혼술이나 마찬가지다. 근대의 문호는 사실적인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실제 자손의 증언도 들을 수 있는 시대니까, 정확성이 부족하다면 직접 물어도 좋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이것도 결코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안 그러니?』
「…글쎄.」
939
엄밀히 따지면 다르지만, 분명 일종의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인 걸. 그러니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일 때문이라고는 해도, 언젠가 나는 끔찍한 벌을 받게 되겠지.
940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준대도 마음 한 구석의 죄악감은 딱딱하게 달라붙은 그대로였다. 이 감정이 떨어질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941
당신이 죽고 난 뒤에 퍼진 당신의 이야기를 몇 십 년 후에야 본인이 직접 접하는 기분을 나는 모른다. 당신의 기록이 당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되어 비판당하는 것을 본인이 직접 보는 기분을 나는 모른다. 좋은 이야기든, 좋지 않은 이야기든 당신에게 있어서는 얼마든지 상처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순리대로라면 당신은 알 수 없었을 것들 뿐이었다.
942
아니야, 전부 이제와서겠지. 나,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
943
누가 봐도, 내가 봐도 내 상태는 절대 좋지 못하다. 말을 천천히 더듬더니, 온 몸을 달달 떨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 커다랗게 뜬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당신은 당혹함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944
이 키워드는 당신과 나의 타협점이다. 이렇게 잠이 많은 사람이 잠 자는 걸 무서워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945
막 악몽에서 깨어나 심한 불안증을 보이던 나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당신에게 이것을 「그냥 정신이상」이라 칭했고, 당신은 역시나라면 역시나랄까 가만히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주변이 전부 달라진 것 같다고 했지.」
『……』
「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어. 그러니까…」
당신의 목소리는 정말로, 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도, 안심시켜 주려는 거겠지. 그리곤 그러니까… 하며 말을 흐리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며 내 손에 그 손을 얹었다.
946
푸훗,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비웃음 따위가 아니야. 그 발상이 귀여워서, 라고 하면 좋을까. 고개를 들고 당신을 올려다보자, 당신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홱 시선을 피한다.
『그러네, 비슷하네. 그럼…』
당신은 다시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947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을 꼭 잡는다. 인간의 온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따뜻한 건 정말이다.
948
가슴에 납덩이를 달면 이런 기분일까. 여러 요소에서 기인한 죄책감이겠지. 무엇보다도 전부 전부 내가 불러온 일이라는 게 나는 가장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과거는 모르는, 오늘만을 살아가는 사람은 계속해서 울었다. 그럼에도 당신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이미 해 버린 일을 어떻게 되돌리겠어…」
있잖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살아 있어서 느낄 수 있는 게 많아. 당신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949
당신은 정말 이상하다. 아무리 나를 굳게 신뢰한다고 해도 그렇지, 나는 당신에 비하면 단순히 나이 뿐이 아니라 생각도 사상도 미숙한데.
950
아무래도 시대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걸까, 한참 어른이라 그런 걸까. 당신의 생각은 도무지 알 수 없다.
951
그러니까 나는, 과거의 나조차도 비난할 만큼 심한 짓을 해 버린 것이다. 당신과 현재를 함께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차라리 모두를 죽여버리는 게 더 나은 선택지일까. 정말로 끔찍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나 자신이 무섭다.
952
이제와서라는 느낌은 있지만, 알아둘 필요는 있다. 스스로 삶을 끝냈던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던 만큼, 이 회의가 네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53
우리는 네가 이 일에 대해 약간의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함께 해 온 시간이 살아온 시간에 비해 너무나도 짧은 만큼,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다.
954
백 년 전에 살아 있었던 우리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여자아이의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비교적 네가 마음을 열어 준 내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군말 없이 네 곁에 있어 주는 것 뿐이었다.
955
아까까지의 기억에 의하면 아마 울다가 그대로 기절했나 보다. 당신은 여기에 있었다. 나는 당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956
난 당신이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말하는 게 좋았다. 약속한 것은 지킨다,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어느샌가 당연해지고, 흐릿해지기 마련인데. 당신은 그렇지 않으니까. 둥둥 떠 있는 날 붙잡아 주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현실이란 것은 유독 나에게 차갑고 무서웠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그 느낌이 몇 배는 더 싫었다.
957
역시 체격차는 어쩔 수 없다. 네 손을 뿌리칠 수 있을 만한 힘은 내게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떨구고 질질 짜는 것 뿐이었다.
958
『너는 어떻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평온할 수 있는 건데…』
모르겠다. 하얀 방에서 나는, 머리 속까지 하얗게 텅 비어버린 것 같아서, 생각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959
다리에 힘이 풀렸다. 네가 손을 끝까지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겠지. 나는 주저앉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네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너는 빙긋 웃었다.
보진 못했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960
어쩔 수 없잖아. 의지하라고 말한 건, 나니까.
961
자꾸 사람을 죽이는 꿈을 꿔요.
962
자기는 괜찮은데 왜 당신이 슬퍼하는 지 모르겠다. 라고 해서, 당신이 괜찮으니까 나라도 슬퍼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마음에 담아 두자고 한 거랍니다.
963
모든 사람의 인생은 드라마야, 자신을 가져.
964
아마 지금도 늦지 않았을 거예요.
965
아뇨,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답니다. 다들 무섭다며 피했거든요. 웃기지 않나요? 몸집 작은 여학생이 뭐가 그리 무섭다고.
966
차가웠다면 미안해. 항상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이럴 때는 참 어려워.
사람 마음은 잘 모르니까 섣불리 뭐라 말할 수가 없네.
967
난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어요. 하지만 금방 다시 떨어져 버리는 나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왜 나만 이렇지, 라고 스스로를 원망하며 살았어요.
968
그렇더라도 쉴 수 있을 땐 쉬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이에요.
969
에? 뭘 일방적으로 당하나요? 사랑을요? 어머… ████ 씨,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당한다」는 동사를 붙이지 않아요.
970
그렇게 따지면 돈도 종이 쪼가린데 돈도 허상이라고 할 건가 봐.
971
사랑은 밥이랑 돈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떨까나? 좀 깨니?
972
마음에 확신이 가는 날부터, 상대와의 관계에 확신이 서는 날까지.
973
가끔은 이렇게 그냥저냥 슬퍼하는 날이 있는 것쯤, 괜찮을지도 몰라요.
974
나쁘지만은 않죠. 그들 나름대로의 「앞으로 나가는 방법」 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975
그렇지만 그들이 그들의 두 번째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걸 우리가 멋대로 단정짓는 건 좋지 않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죠.
976
이야기 자체에는 저도 굉장히 흥미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죠.
977
지금은 그 대답으로 충분해요.
978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어드바이스라면, 들을 수밖에 없잖아요?
979
왜 매번 제가 죽어 있는 사이에 재미보는 일이 일어나는 거죠?
980
이른 아침인데다 23구에서 벗어나 꽤나 한적한 거리에 비석과 꽃 가게가 늘어서 있습니다. 꼭 죽은 사람 전용 부동산 같은 걸.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며 저는 그의 묘를 향해 걷고 또 걷습니다.
981
자주 찾아올 수 있는 게 아니란 것도 사실이지만, 어쩐지 그곳은 너무나도 황량하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아침이라 조용한 이 곳에서, 세상에 나와 이 무덤만이 서 있는 건가, 같은 착각에 빠져듭니다.
982
그래서인지, 외로워 보여서인지, 되도록이면 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83
묘비에 말을 거는 소녀라, 조금 정신이상자 같긴 하지만 뭐 어때요. 저는 정말로 정신이상자인걸.
984
추운 날씨에 몸은 조금 지쳤지만, 기분이 너무 포근하고 좋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만족스럽게 했을 때보다 더 기쁜 게 있을까요?
985
선생님, 저는 그냥 외로웠던 거네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외로울 것 같아요.
986
10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어떻게 스스로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죽음이라는 개념도 이해하지 못할 나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어쩌면 저는 그런 이해가 아주 조금 빨랐을 지도 모르죠. 본인이 아니라도 병과 가까이 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987
옥상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면, 내 눈높이보다 높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이 전부 내 발 아래에 있다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 나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988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그냥 끝없이 펼쳐져 있음에도, 왠지 커다란 반구형의 지붕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늘의 모양은 반구형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열 살이었습니다.
989
여기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면 나는 죽을 거야.
머릿속을 지나가는 한 마디에, 소름이 돋습니다.
990
그럼에도 나는 높은 곳을 좋아했습니다. 혼자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것을, 그냥 멍하게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수 백 번이고 해 봅니다. 상경하고부터는 잘 하지 않게 되었지만, 집을 나오기 직전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옥상이었습니다.
991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언제부턴가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어른스러운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992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딱히 노력이란 걸 할 만한 곳도 없었고. 그냥 이걸 해 볼까, 하면 뭐든 중간 이상은 쳐 버리는 또래 사이의 소위 눈엣가시.
993
그러라고 해. 네가 못 하는 게 왜 나 때문이니?
994
나는… 미안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그들이 그리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995
개인주의는 이런 것인가, 까지는 중학생에게 이른 물음이었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렴풋이 답을 잡고 있었습니다.
996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왜 늘 정신적으로 지치는 걸까. 이 의문만이 풀리지 않은 채 내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습니다.
997
나는 이 곳에서의 인연을 전부 끊어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나에 대해 지나치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같잖았기 때문입니다.
998
자살이라, 어떻게 할까? 언제? 심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그저 인생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나는 인생을 내가 끝내고 싶을 때 끝내려 했을 뿐이니까요.
아무도 그렇게 받아들여 주지 않겠지만요.
999
한다면 하는 사람의 무서운 점은,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이건, 농담이 아니지만.
1000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냥 막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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